샘플
추분이 한참 지났을 때였다. 더운 열기가 조금 식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때에 어느 한 여자가 연필승 댁을 찾아왔다. 여자는 동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칫 학생으로 오해하기 쉬울 정도였다. 대문 쪽에서 마당으로 한 발자국 들어선 여자를 두화가 발견했다.
두화는 익숙한 듯이 여자를 향해 말했다.
“어머, 엽옥파(葉玉派)의 문하(門下) 지망자인 게나?”
그런 연두화에게 여자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신지요.”
여자는 두화에게 인사를 하며, 자신을 한월이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초면이었지만, 익숙한 듯이 대화를 나눴다. 두화는 그녀를 자신의 실(室)까지 안내했다. 여자는 당대 최고 연씨 문하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해서 견문이 넓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두화의 방에서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소리에 연홍은 장지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연홍의 존재를 눈치챈 연두화와 여자는 뒤를 돌아 보았다. 여자는 두화에게 물었다.
“두화 선생님, 저 소녀는 선생님의 제자인가요?”
두화를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연홍에게 들어와도 된다고 말하며 여자를 소개했다. 여자는 다시 한번 연홍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여자가 자신을 밝히자, 연홍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두화 선생님의 문하생이자 제자인 이연홍이라고 하옵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자와 두화는 이야기를 나눴다. 연홍은 옆에서 말을 거들 뿐이었다. 그런 때에 방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화 선생님, 청하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두화는 들어오라고 대답하며, 여자를 소개했다. 여자 또한 청하를 향해 인사를 했다. 청하도 여자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여자는 두화와 이야기를 하며 조심스레 엽옥파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엽옥파 문하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만...”
두화는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눈치였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연홍과 청하는 여자가 엽옥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부담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엽옥파의 문학은 조선 여류 문학계의 큰 별입니다.”
연홍이 그리 말하자, 옆에 있던 청하도 거들었다.
“조선의 여성 문학을 널리 알린 위대한 문학이죠.”
여자는 미적지근하게 웃으며 말한다.
“자부심이 있는 것 같네요.”
연홍은 조금 거만한 표정으로 답한다.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엽옥파는 조선 여성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청하는 거기에 "그래 맞아" 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덧붙인다.
“우리의 문학은 대단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지속’이라는 겁니다. 엽옥파의 문학이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여자는 웃으며 두화에게 말한다.
“두화 선생님께선 이렇게 훌륭한 제자를 두셨군요. 부러울 지경입니다.”
두화는 수줍게 웃으며 답한다.
“이렇게 훌륭한 제자를 둔 건 인정하지만, 사실은 이 아이들 덕에 엽옥파의 위상이 나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이지요.”
연홍은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두화를 한번 쳐다보았다가, 여자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언제나 이렇게 겸손하십니다.”
청하 또한 눈을 흘기며 안타깝다는 듯이 두화를 보며 말한다.
“겸손해도 너무 겸손하지요. 너무 겸손해도 안 좋습니다. 선생님도 자신을 내세워도 될 텐데…….”
여자는 두 사람의 말에 호쾌하게 웃으며 두화에게 말한다.
“제자들이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이니, 두화 선생님께서 엽옥파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하지않으셔도 될 것 같네요.”
두화는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하지만 이내 연홍과 청하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한다.
“아이들의 존재가 엽옥파의 큰 힘이지요. 앞으로도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건만…….”
두화의 말에 두 사람은 흠칫한다. 연홍은 이 일을 무마하려는 듯, 다부지게 말한다.
“그렇지요, 선생님. 엽옥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저와 청하는 항상 선생님 곁을 지킬 겁니다.”
청하는 그 말에 퉁명스러운 듯하지만, 눈빛에는 걱정이 서려 있다.
“그래, 선생님을 보필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지.”
여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엽옥파의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한다.
“그나저나 서양복 차림인 청하 선생과 달리, 두화 선생님과 연홍 선생은 늘 치마저고리인 듯하군요.”
두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연홍은 이게 평상입니다.”
연홍은 자신의 치마저고리를 내려다 보며 말한다.
“두화 선생님 말 그대로입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질문을 한다.
“두화 선생님과 연홍 선생께선 특이한 노리개를 가지고 계시군요.”
연홍은 긍정하며 대답한다.
“예, 이건 엽옥파의 상징이랄까요. 두화 선생님께서 주신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노리개에는 두화가 하고 있는 토끼풀 모양의 장신구가 달려 있었다. 두화는 초록색 노리개가, 연홍은 빨간색 노리개였다. 색만 다를 뿐 토끼풀 모양의 장신구가 꿰어져 있었다. 그러나 청하에게는 노리개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의아해 하며 여자가 청하를 향해 눈을 흘겼다. 청하는 그것을 눈치채고 변명하듯이 말한다.
“일단, 저도 물론 엽옥파의 상징인 토끼풀 노리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이름과 어울리는 파란색이지요. 전 치마저고리는 입지 않아서 노리개를 달고 다닐 곳이 없으니, 제 방에 놔두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여자는 청하의 변명에 웃었다. 그러면서 두화를 잠시 바라보았다. 여자는 두화의 한쪽 귀에 달린 귀걸이가 신경쓰였다. 엽옥파의 상징인 토끼풀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특이하게도 초록색과 하얀색 실끈이 교차하여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여자는 거기에 입을 열었다.
“두화 선생님께선 독특한 귀걸이를 하고 계시네요. 어디에도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는데…….”
두화는 잠깐 놀란 듯 ‘아’ 하고 외마디소리를 냈다.
“한월 님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두화 선생님께선 정말로 토끼풀을 좋아하시는 군요.”
두화는 수줍은 듯이 긍정했다.
“예… 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입니다.”
두화의 말에 옆에 있던 연홍이 갑자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두화 선생님 좋아해요.”
연홍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연홍은 그제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변호했다.
“아니, 저... 그, 선생님께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는 말이었어요.”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연홍의 말실수에 웃었다. 연홍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건 몇 초도 안 돼서 흐트러졌다.
“두화 선생님께 있어서 그 귀걸이는 아주 소중한 것이지요?”
여자의 물음에 두화는 쑥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예, 제가 소중히 아끼는 분께 받은 것입니다.”
여자는 귀걸이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졌다.
“혹시 그건 선대인(先大人)께서 받으신 물건인가요?”
그 말을 들은 두화는 부담스러운 듯 반응했다.
“……아닙니다.”
두화의 반응에 연홍은 여자에게 눈치를 주려고 했으나, 방금 전 자신의 말실수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연홍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를 쳐다볼 겨를도 없는 듯했다. 여자는 자신의 무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두화 선생님을 사모하는 분이라도 계셨던 걸까요, 하하.”
여자의 장난기 어린 말에 두화는 더욱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연홍은 그런 두화를 어딘가 분한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청하는 이 모든 맥락을 파악한 것인지, 이상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한 연홍을 놀려주기 위해 여자의 말에 한 술 더 뜬다.
“사모하는 사람이라니, 흥미롭네요.”
여자는 이번에는 청하에게 눈을 똑바로 쳐다본 채 물었다.
“아까부터 어렴풋이 느낀 건데… 청하 선생께선 뭔가 이미 다 알고 계신 거지요? 그건 당연히 연홍 선생께서도...”
연홍은 여자가 말도 다 하기 전에 그녀의 말을 급하게 끊듯이 청하를 대신해, 대답했다.
“…네, 알고 있어요.”
연홍의 목소리는 마치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는 듯했지만, 차가웠다. 청하는 그런 연홍을 힐끗 보며 연홍의 반응을 살핀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여자는 그제서야 자신의 농담이 지나쳤다는 걸 깨닫고 머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허허...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저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 듯하니, 사과의 의미로 서양의 그... 가배라는 차를 마시러 가지 않겠습니까?”
여자의 말에 엽옥파의 세 여인의 표정이 조금 풀린 듯했지만, 아직까진 언짢은 모양이었다. 특히 연홍은 여자의 무례함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두화의 눈치를 보느라 표현할 수 없었다. 대상이 면식이 있지 않은 생판 남이라는 게 그녀는 괜히 청하를 번갈아보며 분함을 느꼈다. 그런 연홍의 모습을 눈치챈 청하는 조소를 지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라 연홍은 예민해진 자신이 잘못 본 것이겠거니 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가배… 좋습니다. 청하랑 연홍이도 같이 가자꾸나.”
“…네, 좋아요.”
“그러죠.”
연홍은 차분하게 대답하지만, 마음속은 이미 엉킨 실타래와도 같았다. 그런 연홍과 다르게 청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