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옥담

샘플

by 한월

「 一(일) 」


“청하! 당신이라는 사람은 두화 선생님과 동문 선배에 대한 공경이란 걸 모르는 겁니까?”

“두화 선생님은 신이 아니야.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 늘 그런 태도인 겁니까?”

“항상 두화 선생님에게 오냐오냐 받기만 하는 너와는 다르니까.”


연홍은 청하의 말에 더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분함에 주먹을 꽉 쥔 손이 부들댔다. 청하는 양산을 쓴 채 아무 말도 없이 연승필 댁의 마당을 떠났다. 소란스러운 마당에 장지문을 열고 뒤늦게 나온 두화가 연홍에게 말했다.


“또 청하랑 싸운 게냐?”

“두화 선생님...”


연홍은 두화를 보자마자 힘을 줬던 손을 풀었다. 그럼에도 아까의 상황으로 흥분된 감정이 남아 있었다. 연홍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두화를 바라볼 뿐이었다. 두화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연홍은 두화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떨군 채 두화의 풀꽃색 치맛자락과 토끼풀 모양의 노리개를 흘금댔다. 그렇게 땅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연홍에게 두화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며 연홍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때 연홍은 두화의 부드럽고 미지근한 손이 자신의 피부에 닿는 순간 가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두화의 손에 이끌려 가는 도중에 무심코 연홍의 시선은 두화의 뒷모습에 고정시켰다. 아까 보았던 노리개와 똑같은 모양으로 길게 늘어진 실끈의 귀걸이를 한 두화는 연홍에게 하늘하늘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연홍은 자신보다 키가 낮은 두화의 뒷모습에서 그녀의 서툰 솜씨로 묶은 머리카락을 보며 생각했다.


‘옥희도 참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역시 어설픈 구석이 많다니까.’


그러면서 슬쩍 보이는 두화의 목덜미를 보았다. 희고 가녀렸다. 저 묶은 머리카락이 풀려 덮으면 절대 보이지 않을 그것이 왜 이리 신경쓰이는지. 연홍은 문득 자신과 함께 비에 맞아 젖어서 풀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흰 목덜미가 젖은 채 있는 것을 상상했다. 왜 이러는 건지는 연홍 자신도 몰랐다. 그저 찰나의 무의식이었다.

두화의 손에 이끌려 방안으로 들어온 연홍은 두화와 마주보고 앉았다.


“너희 둘은 왜 그렇게 싸우는 게냐?”

“저는 그저 두화 선생님과 동문 선배에 대한 공경이 부족한 청하에게 권면했던 것뿐입니다.”

“또 그런 식으로 변명하고... 내가 꾸짖어 주길 바라는 게냐?”

“아닙니다.”

“연홍아... 나는 너처럼 누군가를 권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부탁을 청한다면 너희가 조금이라도 잘 지내길 바라면 좋겠구나.”

“......마세요”

“응?”

“그런 말 마세요. 잘 지내길 바란다니, 그런 거 저는 전혀 유쾌하지 않습니다.”


두화는 연홍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연홍은 그런 두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뭔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화 선생님, 방금 그 말은...!”

“괜찮다. 연홍이 너도 오늘 일찍 들어가거라. 요사이 해가 짧아져서 서늘하다.”


연홍은 두화의 말에 주눅이 들었다. 짧게 대답하고 두화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장지문을 열고 나가려는 연홍을 뛰따라 일어섰다. 연홍이 갑작스러운 두화의 행동에 놀라니, 두화가 연홍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배웅하러 나가겠다고 했다. 연홍은 사양했지만 두화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거라고 하며 연홍을 떠밀었다. 그래도 연홍은 두화의 그런 모습에 부담스러웠다.


“두화 선생님. 선생님, 의원에서 받은 약은 잘 챙기시고 있는지요?”

“연홍이 네 눈에는 내가 아직도 그리 멀쩡해 보이지 않는 게냐?”


두화는 연홍에게 미간을 구기며 제자에게 병자 취급을 받는 건 아픈 마음이 용서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화는 연홍의 등을 연신 두들겨 때렸다. 그런 두화의 모습에 두려움에 떠는 연홍이었지만, 두화의 장난이 섞인 목소리에 조금 안도감을 느꼈다.


“내 입으로 스승이라고 말하기 그렇지만, 스승이 제자를 배웅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는 게냐.”


늘 수줍은 듯이 그리 말하는 두화에게 연홍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두화 선생님은 제가 선생님이라고 불러 드리고 있잖습니까. 설령 선생님이 저를 받아 주시지 않았더라도 제게 스승은 두화 선생님 뿐입니다.”


웃고 있는 두화에게 연홍은 은근히 진지하게 말했다. 두화는 그런 연홍의 말에 내심 부담을 느끼며 잠시 흔들릴 뻔했지만, 이내 연홍은 농담을 덧붙였다.


“혹시 제가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시려는 겁니까?”


연홍은 장난스럽게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삐친 게냐.”

“그렇습니다.”


연홍이 억울한 아이처럼 입을 삐죽 내밀고 두화를 바라보았다. 두화는 연홍의 모습에 웃음보가 터졌다. 완전히 포기했다는 듯해 보였다. 두화는 연홍의 등을 때리던 손을 멈추고 입가를 가리며 수줍은 듯 쿡쿡 웃었다. 연홍도 같이 웃으며 다시금 두화에게 인사를 하고 노을이 지는 거리를 걸어갔다.



⸻어느 한여름 날의 정오.

연승필 댁에 누군가 찾아왔다. 또 엽록파의 지망자인가. 두화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바깥을 나가보니 이게 누구냐며 반갑다는 듯이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여인에게 한걸음에 달려갔다.


“아, 청하구나. 요사이 통 보이지 않더니 어쩌다가 찾아온 게냐?”


청하는 양산을 쓴 채 두화에게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인사하며 말한다.


“그동안 건강하셨는지요, 선생님. 날이 덥습니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는 길에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요사이 몸은 괜찮습니까?”

“지금까지 영 바깥을 나간 적이 없으니 괜찮다네. 그나저나 청하, 너는 어김없이 서양복 차림으로 어딜 그리 가는 것이냐?”


청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런 청하에게 두화는 날도 더우니 조금 여유가 있다면 이곳에서 잠시 쉬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청하는 사양하며 급히 가봐야 할 곳이 있다고 했다. 두화는 그 말만으로도 청하가 어디에 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게냐.”


두화는 조금 씁쓸한 표정과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청하도 이런 두화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이 짧게 대답했다.


“예.”


두화는 청하의 두손을 잡고 말했다.


“그래도 네가 그리 다니고 있으니 한결 낫구나.”

“당치도 않습니다.”


청하는 그리 말하며 두화에게 웃으며 연승필 댁의 대문을 나섰다.


“다시, 또 오겠습니다.”


그 말은 꼭 '다시는 못 볼 거요.'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두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청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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