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말했던 것 같은 기시감(데자뷰)
여름은 괴롭다.
여름은 대개 짜증나는 계절로 여겨지지만, 어째서인지 여름은 예술에서 많이 사용돼 왔다. 문학, 미술, 음악. 그 고유하고 평범한 배경은 결코 값싸보이지 않는다. 흐릿해질 정도로, 아득해질 정도로 무더운 한여름 속.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여름 속에서 우리는 환각을 본다. 환시다. 그것은 때에 따라 소름끼치는 괴담이 될 수도, 한여름 밤의 꿈처럼 몽환적인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 무더운 여름 속 뜨거운 열기가 만들어낸 하늘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아름다웠던 풍경은 내세에서도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여름의 구름 꽃은 인간의 목숨을 불태워서 피어나고
여름의 푸른 하늘은 푸른 바다를 달궈서 더욱 푸르게 빛난다.
(중략)
한여름 밤의 꿈은 열대야의 몽롱함
피를 토하는 아침과도 같아서
절로 오심이 생기는 법.
-여름이라는 시(24.08.08) 중에서-
여름의 하늘에 있는 구름은 더위를 먹은 우리들의 목숨을 불태워서 꽃을 피어나게 한다. 어느 계절보다도 진한 푸른색을 담고 있는 여름의 하늘도 똑같다. 더위를 먹어 몽롱함 속에서 오심과 함께 일어나게 되는 이른 시간. 밤과 새벽, 이른 아침 사이 속 여름의 시간은 그 경계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모호해진다. 잘 시간이 된 밤에 결코 잠에 이루지 못해, 새벽을 지나고, 이른 아침을 보게 된다. 분명 어두웠을 하늘이 점점 청록색에서 주홍빛을 띤다. 별과 달은 어디에 있었는지 까먹을 정도다. 그렇게 이른 아침을 옥상에서 맞이하며, 겨우 잠에 든다.
귀뚜라미 소리, 매미 소리.
반딧불이가 없어진 지금, 내세에는 점점 생명의 소리도 없어지게 될지. 나는 지금 그런 것만을 궁금해 한다. 쓸데없는 생각에 불과한 이런 것에 나는 여전히 우려하는 듯한 표정이 된다. 지금의 기억을 안고 내세에서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과 나름의 고찰이 담긴 이야기가 잡생각으로 치부된다는 사실에 나는 씁쓸해 한다.
○
밤마다,
샤워를 할 때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릴 때마다,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온다.
지난 날의 일들이 너무나도 어리석게만 느껴져, 그저 우스운 것이다.
과거에 부끄러웠던 일, 지나간 일인 역사 따위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혹자.
극단적/선택적 가치.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역사는 지나간 일일 뿐인데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
-그렇다면 너는 과거의 일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주의인 거니.
-그건 아니지!
-하지만,
‘너의 주장은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는 것 또한 필요없다는 논리로 이어지거든.’
○
나는 과거를 중시할 생각은 없었다. 동경할 의지라고는 없었다. 저절로 그렇게 된 거라고 나는 변명한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현실도피잖아.’
하고 사람들은 나를 꾸짖는다.
알지, 알아. 알고 있다 말고.
회피적인 성격으로 늘 도망치려고 했던 내 모습은 여전한 걸.
늘어지게 된다. 게을러터졌다. 나태해진다. 매너리즘이 도진다. 맛있는 태만.
이 다섯 가지의 말들이 나를 잘 설명하고 있다.
겉으로는 성실한 척, 모범적인 척. 이게 모순, 기만, 가식이 아니면 뭔가. 가장 싫어하는 세 개를 나도 하고 있는 걸 깨달으면 헛웃음이 나오는 건 당연한 거잖아?
물론 결과로 나 들통나버려서 허무해지는 것도 당연한 거지만.
의식의 흐름으로 쓴 글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쓴 글이라며 포장하는 것도 똑같잖아?
돌아가고 싶은 과거를 미화하고 반성은커녕 멋대로 왜곡해, 우습다며 헛웃음을 짓는 거랑 말이야.
○
이제 슬슬 과거 회상에서 깨어나라고 나를 재촉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형성되는 풍경들부터 일단 정리하여, 16mm 필름으로 투영하고 싶다. 아니, 이런 비유적인 건 그만 두고, 대략 몇 천 자 이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은 것이다.
식당에 있던 형형색색의 놀이방. 사방팔방 물들이 뿜어져 나오던 풀(pool). 거기서 만난 이름 모를 친구들. 병원에 입원하여 들어간 병실. 작은 손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 거기서 잃어버린 아끼던 인형. 언젠가 아끼던 아기 고양이 인형. 알록달록한 풍선과 공. 어린이집에서 간 소풍. 가족 모두랑 함께 여름에 동물원을 갔던 일. 봄에 갔던 대공원. 분수대가 있던 도서관에서 “이상한 화요일”이라는 책을 읽고 저녁이 되면 분수대에서 놀던 일. 도서관의 풍경, 분수대. 공원 놀이터에 있던 커다란 미끄럼틀. 그네와 시소가 있던 커다란 놀이터. 언덕 위에 있던 초등학교. 바로 앞에는 문방구. 교문 바깥까지 배웅하던 선생님. 내리막길. 자전거. 초콜릿 무스가 맛있었던 카페. 근처에는 경찰서. 동네 구멍 가게에서 팔던 싸구려 초콜릿과 사탕. 솜사탕과 비누 방울. 산속에 있는 커다란 민속 집. 밤에 보았던 반딧불이. 우연히 찾은 네잎클로버.
2009년의 기억. 2010년의 기억. 2012년의 기억. 2014년의 기억. 십 몇 년 전의 기억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고, 반년이 흐르고, 1년이 흐르고… 그걸 반복하면 반복할 수록 점점 멀어지는 그 시간의 기억들. 그 모든 추상적인 것도, *부동자세도 **제행무상을 피할 수 없으며 이는 곧 ***불가언설성으로 이어진다.
*부동자세: 움직이지 아니하고 똑바로 서 있는 자세.
**제행무상(諸行無常): (불교 용어)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함.
***불가언설성(不可言說性): (불교 용어)언어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이나 상태. ⇒말을 하는 순간 본래의 의미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