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 기록
이건 확실히 수필이지만, 소설처럼 기록하고 싶다. 내가 쓴 모든 수필들이 그렇게 되길 원했고, 실제로도 근접하게 된 것 같다. 나는 방금 망설였다. '아닐 수도 있다'는 말에서 나는 혹자의 눈치를 보게 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다.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변명, 아니, 그 말을 또 변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이걸 '겸손'이라며 합리화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기만'일 거라는 걸 생각한다.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혹자의 반응을 살핀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시간은 체감상 거의 없다시피 하다. 자기객관화를 한다고 노력은 했지만, 내가 크나 큰 착각을 한 듯하다. 줏대없이, 소신이 없는 나 자신이 무엇을 보고 어떤 선택을 해서 어떻게 결정을 내릴 것인지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헛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들었던 말 중에 내가 그 사람의 행동을 싫어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행동에 질투하고 있는 거라는 것이었다. 즉, 저 사람은 저런 행동을 스스럼없이 막 할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하니까 혐오감이 든다는 것이다. 그 행동이 나쁜 일이든 선한 일이든.
말을 길게 하면 길게 할수록 군말이 나오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내 글이 딱 그렇다. 내 글에서 보는 나는 이렇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인 척하며 이상론을 펼치는 인간.
요즘 '거울'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다.
고등학생 때 지상철로 등하교를 할 때마다 승강문에 기대어 비춰진 내 모습을 슬쩍 보고 피하고를 반복했던 것이 생각난다. 애써 제대로 마주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제대로 마주하는 순간 비춰진 내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혐오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그 감정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일부러, 억지로 만든 감정 같았다.
예로부터 거울은 또 다른 자아를 상징한다곤 했다. 그것이 진정한 자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피했다. 평범하고 수수하다. 못났다는 건 과장된 말이고, 아무래도 그 말이 정확한 것 같다.
그게 좋은 거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가 또 다른 자아라면 성격이라는 것도 존재하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건 대단한 호기심이 아니였던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 생각을 몇 번이고 하면서도 거울에 손을 대고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거울에 손을 대어봤자 거울만 더러워질 뿐이다.
또 다른 자아와 만나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역시 내가 매일 4시 44분을 보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겠지.
이대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게 돼서 더이상 정신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뭘 해도 무덤덤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하고 동경했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쪽이 더 정신에 안 좋으려나 하고 생각을 고쳤다.
감정을 없애면 이성만 남을 줄 알았던 것이 만약 감정과 이성이 하나라면... 그건 꽤나 곤란한 일일 것이다.
<오만과 편견>, <감성과 이성>
제인 오스틴의 소설.
뭔가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늘 이런 식으로 나는 읽지도 않을 책을 직접 사서 수집한다.
미친듯한 졸음이 쏟아졌다. 그렇게 잠에 들어버린 나는 늦은 저녁에 눈을 떴다. 방 바깥 거실 쪽에서 삐삐 하고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 도어락이 내는 소리였다.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서 나는 소리다. 주택이라서 여름만 되면 집안이 열기로 차올라, 항상 현관문을 여는 대신에 방충망 문을 닫는다.
잠에서 쉽게 깨어나지 않았던 나는 그 소리가 들려도 바깥으로 나가서 확인해보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문을 제대로 닫지 않으니 나는 소리라고 생각했고, 누군가 온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각이었던 것은 분명해서, 저 소음을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천장을 향해 침대에 누워 있었다. 형광등 빛이 닫고 있는 눈꺼풀 사이로 들어왔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부셨다. 금방 잠에서 깨어나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쉽사리 눈을 뜨지 않았다. 이러면 잠에서 깨어났다는 의식이 들어도 꿈을 조금이나마 꿀 수 있다. 최소한 꾼 꿈을 희미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잠에서 깼을 때는 기억은 왜곡되어 있고, 꿈속 이야기는 부풀어져 있었다. 그런 꿈에서 나는 어떤 광경을 보았다.
최근에 산 유카타를 다른 사람이 입고 있었던가. 내가 꾸는 꿈은 거의 제삼자의 시점이라서 설령 내가 입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 마치 이인증과도 같다. 유체이탈을 한 듯한 기분이다. 저 건너편에서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있어야 할 거면 어렸을 적 나를 보여줄 수는 없는 걸까.
불만이 있는 듯이 투덜거렸다.
어찌 됐든 간에 확실한 건 유카타만 걸치고 있고 허리끈이나 오비를 전혀 매고 있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꿈의 회상을 하기 전, 잠을 깨자마자 한 일은 옆에 있던 폰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인스타에 스토리를 올린 것에 좋아요를 누른 알림을 제외하고, 다행히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인맥이 넓지 않아서 내게 연락을 먼저 해오는 이는 그나 그녀뿐이지만, 잠에서 막 깨어나서 신경을 곤두서 있던 나는 다른 사람을 상대해 줄 여력이라곤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인스타 디엠을 확인했다. 낮잠을 자고 저녁에 일어났을 때마다 하는 짓이다. 아마도 이것도 버릇이 되겠지. 눈을 뜨자마자 내가 쓴 글의 통계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디엠에는 내가 그에게 보낸 문자에 그가 대답한 흔적만 있었다. 그런 것치곤 웬일인지 이후의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카톡으로 연락이 다시 왔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뉴스를 보았다.
군 간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며칠 전 했던 말대로 군 내부의 사건은 기사화가 되었다. (거의 며칠 전 사건인 듯이 보도됐지만 아마도 그것보다 전이라고 생각한다.) 군 간부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북한군이 경계선을 넘어 왔었다는 것과 함께 보도가 됐다. 이건 이틀이나 사흘 전 그에게 어렴풋이 들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건 오늘 오후에 기사화가 되었던 거이었다. 기사에서는 유엔군이 어쩌고 하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에게서 그런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아니, 듣지 못했다.
연중무휴 초소를 지키며 앞이 보이지 않는 날을 보내는 그들에게서 허공에 손에 뻗었지만 헛손질밖에 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정말 기분탓이겠지.
침대에서 내려왔다. 장롱 거울 앞에 섰다. 마음에 들어한 교복(세일러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비춰졌다. 수많은 이미지들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깨까지 내려온 이 검은색 머리카락, 혹시 가발 아니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뒤로 하고 잠을 깨고 나니 밤 9시가 넘어 있었다. 이미 도어락의 경고음은 멈춘 채였다. 그래도 거실로 나가, 현관 바깥으로 나갔다. 방충망의 여닫이 문을 열었을 때 풍경 소리가 났다.
위를 보니 저번에 내가 깨뜨린 풍경이 있었다. 물론 새 거였다. 그건 완전히 박살이 나서 고쳐 쓸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게 있었던가 싶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시원했다. 내가 여름방학 동안 온종일 집안에 있는 한 에어컨은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여름도 지나갈 즈음이라 밤이 되면 그리 덥지 않지만 그래도 끄면 더웠다.
나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내가 느낀 이 위화감과 미시감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더이상 알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내심 중얼거렸다.
깨어날 꿈을 잊어버리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8월이 끝나도 날씨는 여름이겠지만, 9월이라는 그 숫자 하나에 연연한다. 그런 거 하나가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현실은 아직까지 여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언정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8월(八月)이라는 말에서 주는 안정감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여름의 끝자락.
내년 여름에 다시 만나고 싶은 푸른 잎사귀와 바람에 흔들리는 그런 밤.
물속에서(수중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는 여름과 겨울에만 들을 수 있다.
그런 계절이 있다.
오늘은 말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내일, 모레 때문에? 아니면 그저 잠에서 덜 깬 것뿐인 걸까.
그러나,
내가 여기에 글을 남기는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
당신의 사정, 사연 따위는 아무렴 좋은 거야. 당신이 설령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사정이나 사연은 그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아요. 애초에 그들은 알고 싶지도 않거든요. 그리고 세상이 당신을 이해할 이유도 없죠. 공감을 기대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그만 두세요. 당신의 사연 따위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거거든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에요.
모두들 자신이 가장 힘들다고 하거든요.
여장을 취미로 하는 남자가 그리 말했다.
남자치곤 얇은 목소리다. 흰 피부, 가녀리고 긴 손가락, 요염한 몸짓. 겉으로는 상쾌해 보이지만 의외로 사실은 냉정하기 짝이 없다. 말투는 '어머'라고 하는 주제에 말버릇이 나쁘다.
아, 이건 전부 나의 상상(망상)이다.
이런 인물 따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한다.
"우리는 소설 속 사람이 아닌, 진짜 인간이잖아?"
습하고 무더운 여름 속에서도 그 말을 들은 순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쳐왔다. 도려내는 듯 서늘한 감각이었다.
비밀을 알아챘을 때 커다란 책장이 날 덮쳐왔다.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있던 파일들이 둔기가 되어, 내 머리를 가격했다.
그건 단순히 네가 알아챈 것을 잊으라는 의미가 아니였다.
사상이 다른 나를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다는 의도였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