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

그 속뜻은 미화될 수 있을까

by 한월

살고 싶다는 말은 언제 할까.


아마도 타인에게 위협을 받을 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이고, 또 하나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가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했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에게 칼로 찔리거나, 막다른 벽에 몰아붙혀진 채 목을 졸리는 상황에 웃으면서 상대방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어리석다는 것에 비웃을 수 있을까.


그런데 아니였다.


나는 벽에 몰아붙혀진 채 목이 졸렸던 적이 있다.

상대방이 내 목을 졸라서 목에는 손톱으로 긁힌 상처가 생겼다.

목이 졸렸을 때는 나도 감정적인 상태였지만 목이 졸리는 상황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나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나를 죽일 것 같다는 공포감이 들었던 것이 그 이유다.


내가 상상한대로 이런 상황에서는 웬만해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협하는 사람은 거의 감정적인 상태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비웃는 행위는 그 사람을 자극시키는 일밖에 더 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차들이 달리고 있는 도로에 몸을 던지는 일은? 빨간불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은?


바로 앞에 있는 칼날이 내 목을 들이대고 있으면?

그전에 나를 원망하는 이는 무작정 나의 몸 여기저기를 찌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심각한 출혈로 고통에 몸부림치더라도 나는 웃을 수 있을까.


이상한 생각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이유도 뭔지 모르겠다.

아니, 잘 알고 있을 테다.

그게 멋있어 보이니까?

평소에는 죽음을 미화시키며 찬양하고 바라면서 실제로 죽음이 자신에게 들이닥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를 느끼는 게 현실이다.

웃을 수 없다.

그래서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것조차도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타인의 손에 죽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뿐이니까, 타인의 손이 아니면 돼.

그래,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런 한심한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죽음이란 건 없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황이라면 어떨까.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 것 같다.

죽음이 무서운 걸 넘어서 증오스러울 것이다. 그전에 자신의 인생을 시한부 인생으로 바꿔놓은 병에 증오를 할까.


그럼에도 웃을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우울하고 죽고 싶은 나에게는 그런 걸 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실제로 나도 겪었던 일이다.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게 나아. 하지만 죽는 건 두려워."

"누군가 나를 죽여 줬으면 해. 그게 아니면 내 인생이 시한부 인생으로 바뀌어서 저절로 빨리 죽기를 원해."


자연사, 돌연사, 병사, 사고사, 아사, 객사, 고독사, 자살, 타살, 옥사, 객사 등.

죽음의 종류는 이 정도만 하더라도 많다.


당신은 어느 죽음에 웃을 수 있는가.

당신은 어느 죽음에 기쁠 수 있는가.

당신은 어느 죽음에 감사를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어느 죽음에 살고 싶은가.


자신의 몸에 스스로 낙인을 찍는다. 그것조차도 중독이 돼버린다.


어느 순간에 유서를 남길까.

유서를 쓴 채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정말로 있는 걸까.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정했다면 그것도 시한부 선고인 걸까.


이것조차도 자신의 인생에 스스로 낙인을 찍는 일이다.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간다는 건, 물론 아직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 양팔에 있는 흉터도 낙인이라고 하면 낙인이겠지만.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는 게 부끄럽지 않다면, 나 스스로가 아무렇지도 않다면 괜찮은 걸까.

아니, 분명 아닐 것이다.


정말 사회로 나갔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건 뭐냐고 물으면 그때부터 아무렇지 않은 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 다시, 인간은 자기 연민에 빠진다.


낙인을 찍을 때에는 기분이 한결 나았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내면의 상처가 바깥으로 드러나 명확하게 보여진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어렸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하며 그때 낙인을 찍힌 것을 보면 후회하며 그제서야 수치심을 느낀다.


자각을 하는 순간, 자기객관화가 되고, 동시에 자기 연민에 빠져 있게 된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자각하는 순간 괴로워지겠지.


그 누구나 눈살을 찌푸리며 끔찍하게 극도로 싫어할 자기 연민을 하고 있는 나와 사회에서 정해 둔 감정선이 어디까지인지.


그토록 냉정한 현실이 피부에 와닿아서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

한마디로 자기 연민과 자기객관화 사이에서 고통받는 것.


하지만 여기서 자기객관화는 어쩌면 가짜일지도 모른다.

자기객관화를 하는 척하는 사람인 것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수의 혹자가 받아들이는 일, 다수가 집단하여 만들어진 사회에서 그런 일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사정이나 사연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 나 또한 그들의 사정이나 사연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고,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나 화합은 생각보다 어렵고 너무나도 이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렇게나 모순적인 생명체이기 때문이겠지.


요컨대 이 글에서 살고 싶다는 말은 죽고 싶다는 말로 치환될 수 있겠지.

그리고 정말로 죽고 싶다는 의미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 맞는 걸까?


나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생겨난 생각을 멈추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상한 논리, 이상한 말이 된 것이 이유라고 한다면 그것도 변명이려나.


만약 내 앞에 또 다른 자신이 나타난다면, 그리고 그 자신은 내 어두운 내면이라면 당신은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 어두운 내면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겠지.
-고독은 싫어.
-허세를 부리지 않으면, 괜찮은 척을 하지 않으면 몸이 떨려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게 돼버려.

그렇게 말하는 그것에게 나는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아무리 옆에서 나를 지지하고 실은 강한 사람이라며 북돋게 해 줘도 당신의 그 내면도 또 다른 자아이기에, 그것조차 나이기에 당신은 아마도 그것을 죽이려고 들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그런 말들로 당신을 더욱 자극시켜, 그것을 없애려고 한다면 당신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당신은 나 자신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자신이 있는가?


그렇게 해서 당신이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다면, 그 유혹하는 올가미에 발목이 잡힌다면 분명 알아챌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라는 태만한 말로 자신이 자신을 속아 넘긴 걸 깨닫고도 호쾌하게 웃을 수 있겠는가?


깨달음에서 온 자기객관화와 그럼에도 소용돌이치며 불행을 멈추지 않는 자신 속에서 당신은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런 모순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


누구나 모순을 싫어하고 혐오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모순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다지 기분이 마냥 좋지 않을 것이다.


증오에서 애증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할까.


그리고 그런 순간에 웃음이 나온다면 그건 분명 헛웃음에 불과할 것이다.


당신들은 지금 어떤 가치관으로 줏대 있게 살아가나요?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 그것만이 가장 궁금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8월의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