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2018)
“퓨처 랜드에 새 차가 들어왔대!” 무더운 여름, 티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말괄량이들의 장난이 시작된다. 1965년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부산물이자 경제 위기에 떠밀린 홈리스들의 주거지인 디즈니랜드 옆 모텔들은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의 놀이터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주차된 차에 침을 뱉고, 속이 훤히 보이는 술수로 구걸을 하는가 하면, 버려진 폐가를 유령 응가가 가득한 댄스룸으로 둔갑시킨다. 화사한 색깔의 모텔 건물과 순수한 아이들의 장난이 어우러져 영화는 내내 찬란하게 빛난다. 하지만 카메라가 스치는 무니의 일상은 그저 밝지만은 않다. 카메라는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그러면서도 아주 선명하게 무니의 일상 곳곳의 얼룩을 목격한다.
1965년, 미국의 거대한 대중매체 기업인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랜드 건설을 위해 플로리다의 올랜도 주를 매입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인근 모텔들 역시 파스텔 톤으로 색을 맞추며 환상의 나라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국의 경제 위기가 불어 닥치자 인적이 끊긴 모텔촌은 폐허가 되어갔다. 그리고 주택담보대출인 서브 프라임 모기지의 원금조차 갚지 못하는 저소득층 홈리스가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동화 속 궁전 같은 이 공간에는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 낙오된 빈민들이 남았다. 카메라는 자주 이 공간을 거대하게 포착한다. 돔 형식의 오렌지색 지붕이 화면을 꽉 채우고, 마술사의 커다란 모형이 눈에 띄는 선물가게가 화면 중심에 나타난다. 보랏빛 모텔인 매직 캐슬은 영화의 주 공간으로써 인물들의 주위를 둘러싸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은 이 건물은 시종일관 인물들을 압도한다. 인물들은 그 속을 위태롭게 가로지르고 뛰어다닌다. 마법의 성 같으면서도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이 공간, 그곳에 무니가 있다.
숀 베이커는 디즈니랜드 옆 퇴락한 모텔촌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귀여운 악동 무니를 소환했다. 롱쇼트로 건물들을 조명하던 카메라가 소환된 무니의 얼굴로 곧장 다가서면, (위협적이지만) 환상적인 공간과 때 묻지 않은 무니의 순수함이 만나 알록달록한 이야기를 만드는 듯하다. 그러나 롱쇼트와 클로즈업은 결코 봉합되지 않는다. 두 쇼트의 간극 사이로 핼리와 바비, 그리고 애슐리의 얼굴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들이 겪는 현실이, 그 현실로 인해 비틀어지는 이들의 관계가 환상으로 나아가려는 서사를 방해한다.
사회복지시설에서 인형을 갖고 놀고 있는 무니의 쇼트가 그렇다. 인형놀이에 열중한 무니를 바라보는 쇼트 우측으로 핼리의 모습이 흐릿하게 끼어든다. 핼리가 무니보다 화면 가까이에 있음에도 초점의 변화 없이 카메라는 무니를 응시한다. 쇼트의 주체가 무니임이 분명한데, 그 귀여운 장난 위로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핼리의 외침이 들려온다. 무니의 순수한 표정 위에 쌓이는 핼리의 울분을 통해 느껴지는 아이러니함에서 이 영화가 단순히 명랑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맑은 아이들의 모습 위로 불쑥,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불안이 잠식해 든다.
핼리와 무니가 수영복 사진을 찍고 난 후, 무니는 줄곧 목욕을 한다. 쇼트를 메우는 거친 음악과 무니의 모습은 왠지 이질감이 드는데, 현실은 또다시 그 이질감을 타고 무니에게로 흘러든다. 성매수 남성이 벌컥 문을 여는 순간 무니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카메라는 무니를 가만히 응시하며 지켜본다. 무니의 감정, 표정, 그리고 기다림. 그 몇 초의 기다림 안에서 우리는 무니 앞에 서서히 고개를 드는 현실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현실에 절여진 핼리의 외침, 성매수 남성의 목소리, 시끄러운 헬기 소리와 날카로운 자동차 소음들은 그렇게 무니의 쇼트에 얼룩을 새긴다. 거대한 공간을 조명하던 카메라가 무니의 얼굴로 직행하는 그 순간, 그 간극을 타고 무수한 마찰이 침투하면서 무니를 위협하는 것이다. 환상은 깨져버린다.
어쩌면 숀 베이커가 의도적으로 무니를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모텔을 옮겨 다니며 전전긍긍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비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무니다. 홈리스에게 빵을 배급하는 차량을 화단 뒤쪽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기라고 하는, 소외된 이들의 모습을 지우려는 장면 역시 무니로 채워진다. 이로써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겪는 현실은 우리 앞에 잔인하게 내려앉는 것이 아니라 외화면의 음성으로 머무르면서 자극적이지 않게 관객에게 다가간다. 우리는 발랄한 무니의 모습을 통해 현실을 목격하고 좀 더 깊고 진한 여운과 아픔을 느낀다.
오카 마리는 "영화로 타자성을 재현할 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프레임을 통과하는 순간 그것이 스크린 밖 안전한 위치에 앉은 관객들에게 '엔터테인먼트 물질' 수준으로 소비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 타자성이 누군가의 고통과 관련된 것일 때 영화관은 그 고통을 편안한 의자에 앉아 구경거리로 제공하는 관음의 공간으로 오염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오카 마리, 김병구 옮김,《기억 서사》, 소영 출판, 2004, 78-81쪽) 숀 베이커는 오카 마리의 말을 대변하듯, 타자의 가혹한 현실을 윤리적 목적에 따라 섬세하고 애틋한 시선을 담아 스크린 위로 가져왔다. 숀 베이커가 바라본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관객에게로 확장된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디즈니랜드로 도망친 무니와 친구 젠시가 발목이 붙잡힌 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겠지만) 숀 베이커가 바라본 시선이 관객에게로 전이됨으로써 현실의 무니가 부디 자유롭기를 바란다.
세상의 모든 무니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