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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온 Nov 23. 2019

네가 아는 정의(justice)는 Joke다!

<조커>(2019)




뉴스가 흘러나온다. 길거리에는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꿉꿉하고 지독한 악취가 풍긴다. 스크린 안으로 흘러든 외화면 사운드는 내화면에서 아서 플렉과 만난다. 언론은 아서를 사회의 악이라 칭하고, 저 멀리 치워져야 할 존재로 치부한다. 이에 아서는 화면을 꽉 채운 클로즈업 안에서 두꺼운 분장을 한 채 입꼬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만들어낸 가짜 웃음으로 답한다. 하얀 얼룩을 뒤집어쓴 광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쓴웃음을 짓는 일뿐이다. 광대 일을 하던 아서가 짓궂은 아이들의 장난에 어둡고 쓰레기가 가득한 골목에서 흠씬 두들겨 맞은 조커를 바라보는 카메라는 흥미롭다. 시선을 길바닥으로 내리깐 채 높이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줌 아웃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아서의 위치를 은유하는 이 쇼트까지의 오프닝 시퀀스는 '조커'를 설명하는 하나의 단편영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그리고 이 오프닝 시퀀스를 완성시키는 쇼트들은 영화 말미에서 아주 정치적인 힘을 갖는다.

 

영화의 서사는 단순하다. 신경질환을 겪고 있어도 순수했던  아서가 악의 상징인 조커가 되는 과정. 카메라는 아서가 조커에 의해서 새롭게 쓰이는 정의(justice)의 의미를 훌륭하게 잡아냈다.


아서는 아주 부드럽고 느리게 춤을 시작한다. 카메라는 아서의 발에서 시작해 서서히 몸을 훑어 올라가고, 손의 움직임을 따라 정성스럽게 유영한다. 그의 신체를 클로즈업으로 분절해놓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나가는 카메라의 모션은 아서의 모습을 바스트 샷까지로 제한을 두면서 그의 신체 앞에 거울을 가져다 놓는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태아와도 같다.


라캉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아가는 아이의 성장과정의 결정적인 계기를 거울 단계로 설명한다.
거울 단계 이전에 상상계 속에 머무르던 아이는 자신의 육체를 분열되고 조화롭지 못한 것으로 인지한다.
그러나 아이가 거울을 마주하고 이상적인 이미지, 즉 통일되고/전체적인 이미지를 보는 순간,
그동안 동일시 해왔던 어머니/타자와 분리되고, 자신의 이미지가 어머니/타자에 의해 조건 지어짐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언어로 진입하면서 상징계의 질서에 들어서게 된다.
결국, 주체, 즉 이상적 자아는 타자와의 동일시/거울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수잔 헤이워드, 이영기 옮김, 영화 사전, <정신분석학>, 한나래, 2012 참고)
(홍성욱, <라캉의 주체 이론을 통한 형태 생성에 관한 연구>, 국민대학교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교 박사논문, 2006, 21~25쪽 참고)


금융원을 살해한 아서는 거울을 마주하고 파편화된 신체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이어나간다. 그가 자신을 속인 어머니를 살해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조커로 향한다. 초록색 머리로 물들이고 분장하며 춤을 추는 조커는 기울어진 사각 앵글 안에서 불안한 듯 신이 났다. 준비를 마친 조커가 랜들까지 죽이고 나면, 암울하게 올라갔던 높은 계단을 경쾌하고 멋진 몸짓으로 내려오면서 풀숏으로 완전해진다. 거울 앞에 섰던 아서가 완벽하게 조커가 되는 순간이며 새로운 정의의 의미가 발현되는 순간이다. 더이상 영웅은 위를 향하지 않는다. 조커는 아래로 향함으로써 영웅이 되기를 택한다. 그렇게 조커의 정의 실현은 사회의 권력뿐 아니라 웃음의 주도권까지도 뻬앗아버린 위선적인 머레이를 살해함으로써 완성된다.


바르고 의로워야 할 정의의 의미는 여자를 앞에 두고 비아냥 거리는 세 금융원에 의해, 아서의 인생을 속여온 어머니에 의해, 약자인 게리를 무시하는 랜들과 자신의 코미디를 조롱거리로 이용하는 머레이에 의해 훼손되고 더럽혀진다. 정의라는 이름 앞에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경찰들은 지하철과 도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목소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조커는 그와 같은 부조리 앞에서 웃을 수밖에 없고, 권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밀려났던 자신과 타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즐겁게 춤을 춘다. 그에게 있어 춤이란 허위와 허세에 가득 찬 권력과 변질되어버린 정의를 향한 조롱이자 저항이며, 정의의 의미를 새롭게 써가는 방식인 것이다.


도시는 불타고 광대들은 날뛴다. 고인 권력에 의해 썩어버린 정의는 조커가 경찰차의 보넷 위에서 부드럽게 춤을 추고 얼굴을 피로 물들이면서 재규명된다. 경찰차를 밟고 서는 조커의 컷 뒤로 도망치는 웨인 가족의 쇼트가 이어지고, 토마스 웨인과 아내는 그들의 뒤를 쫓던 광대에 의해 살해된다. 바로 연결되는 조커의 몸짓. 이렇게 모순적인 정의의 주체들은 삭제되고, 주체에 가려졌던 타자들의 정의가 새롭게 탄생한다. 피로 물든 조커의 웃음 뒤로 말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가히 파격적이다. 정신병원에 간 조커의 상상 속 장면은 '타자에 의한 정의'의 결정적인 핵심이 된다.  길바닥에 내리깔린 시선에서의 브루스 웨인과 죽은 토마스 웨인과 부인. 이 쇼트는 앞서 말했던 조커의 오프닝 시퀀스와 동일한 시선에 머무른 다는 데에 의미가 크다. 서로 다른 주체를 같은 시선에 조명함으로써 고위 권력층에 있던 웨인 가족을 조커 위치로 끌어내리고,  <다크 나이트>를 비롯한 권선징악의 모든 영웅 서사를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권위주의, 영웅주의, 국가주의, 공동체 중심주의 등 거시적인 관점에서 상징됐던 정의(justice)는 삭제된다. 그것은 더 이상 전체의 것이 아니며, 거시 관점에 의해 누락되었던 개인과 욕망, 쾌락, 취향 등에 의해 재구성되어야 함을 조커는 말하고 있다. 정의가 권력이 아닌 개인과 타자로 향할 수 있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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