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잘 잊어버린다고 했던가. 아마도 어느 정도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0년도 더 지난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괜히 가슴이 미어지는 걸 보면 그 말이 틀렸거나, 내가 어른이 덜 됐거나. 그도 아니라면 정말 잊을 수 없거나.
영화는 첸니엔(주동우)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우유 당번을 하는 첸니엔에서 어두운 밤 귀갓길의 첸니엔까지 우리는 그녀의 얼굴보다 뒷모습에 익숙해진다. 그렇기에 그녀의 표정도, 그녀가 처한 상황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녀를 모른 척했기에 알 수 없었고, 뒷모습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명문 대학 입학. 같은 목표를 두고 수백만명의 고등학생이 책장을 넘긴다. 시계 초침이 흐를수록 책상 위엔 책들이 쌓여 칸막이가 된다. 그렇게 생겨난 무관심. 우리는 누구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보다 개인의 성공이 우선시 되는 경쟁사회에서 자살한 친구에게 옷을 덮어주는 선의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타인을 향한 도움이 문제시되고 진단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첸니엔의 행동은 의심받고, 학교폭력의 대물림으로 이어진다. 도움이 문제가 되는 사회.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늘 타인을 공경하고 배려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손을 먼저 내밀어주는 그런 삶을 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철저히 밖으로 향하는 손길을 곁눈질한다. 첸니엔이 홀로 걸어 나와 수많은 학생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겉옷으로 시체를 덮어주는 순간, 선의의 발걸음은 주변 시선들에 의해 두 인물의 문제시되는 관계에 대한 어떤 행위로 둔갑해버린다. 단순히 타인을 향한 도움이 필요한 순간임을 아주 잘 알면서도
화면을 가득 메운 첸니엔의 뒷모습은 그녀의 얼굴을 진심으로 마주할 때 사라진다. 첸니엔은 길가에서 폭행당하던 샤오 베이(이양천새)를 돕고 그에게 보호받는다. 그때부터 뒷모습을 조명하던 카메라는 그 자리에 샤오 베이를 둔다. 서로에게로 향하는 도움과 관심. 이것이야말로 폭력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던가. 영화는 이렇게도 친절하게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못했던 이 문제의 해결방법을 영화적 방식에 기대어 설명한다. 등 돌린 이들의 어깨를 두드려 얼굴을 마주할 때 비로소 대물림되는 폭력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것임을. 그렇기에 자살한 친구의 얼굴이, 폭행당하던 샤오 베이의 얼굴이, 그리고 첸니엔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따라붙는 것은 우리가 이들의 얼굴에 주목해야 함을, 이들의 표정을 읽고 관심을 가져야만 함을 강조한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우리를 향한 일종의 선언. 우리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그저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지.
영화가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고 온전히 피해자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가고 있음에 감사한다. 또한 피해자 재현에 있어서도 주의를 기울이며 윤리적인 선을 지키고자 노력한 세심함 역시 칭찬한다. 이것이, 영화 결말부에 과잉된 로맨스로 얼버무려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애정하게 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