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호>가 개봉했다. 두 번의 개봉 연기를 거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한 <승리호>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한국형 SF'로 불리며, 한국만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넷플릭스의 마케팅 탓인지 개봉 초반은 흥행에 성공하는 듯싶더니 이내 그 열기는 식어버렸다. 내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승리호> 봤어?'라고 물으면 대부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20분 보고 잠이 들었다는 둥, 어울리지 않는 역할에 질려 꺼버렸다는 둥. 그리 좋은 평가는 듣지 못했다.
내가 영화를 마주하고 꽂힌 건 '업동이'라는 캐릭터였다. 인공지능 전투로봇 업동이. 인간의 형상을 하지 않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역할이었다. 이를 유해진 배우가 맡았다. 이 배우만큼 얼굴을 비추지 않고도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그는 개성 있는 목소리만큼이나 꽉 찬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로써 이 영화의 평가를 마무리하기엔 이른 감이 있다. 나는 <승리호>를 보며 두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승리호>는 과연 SF 영화인가. <승리호>가 말하는 '한국형'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2092년 미래를 그린다. 지구는 황폐화되었고, 우주 도시에는 소수의 인원만 머무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광활한 공간에는 밖으로 떨어져 나온 파편을 청소하는 우주 청소원이 있다. 승리호 역시 우주 청소선으로 생사를 걸고 우주 쓰레기를 팔아 근근이 생활한다. 그러다 대량살상 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하고 위험한 거래를 시작한다.
Science Fiction. 이른바 공상과학 영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후 수많은 공상과학 영화가 쏟아져 나오면서 장르 역사를 이루었다. 장르가 갖는 관습과 이미지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SF 영화의 거시적 내러티브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관객이 경험할 수 없는 시간과 현실에 없는 공간으로의 초대. 그 시대의 인간과 외계인의 갈등. 미래 비전에 대한 인간의 관념과 불확실성에 대한 철학적 고민. 그리고 휴머니즘. 한마디로 SF 영화는 미래 시대의 인간상을 그리면서도 현재 인간상에 안주하려는 서사적 흐름을 구성한다.
<승리호>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승리호>의 내러티브는 미래 비전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없다. 세 군데로 나뉜 공간은 계급을 설정하고, 계급 구성원은 이득을 위해 싸운다. 이 갈등은 선과 악을 분명하게 명시하며 누구에게 승리의 깃발을 쥐게 할 것인가에 몰입하도록 한다. 즉, 발전한 미래와 현재 인간상에 대한 갈등구조가 아닌,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의 대결 구도가 그려지는 것이다. 우주 공간의 탈을 쓰고 전쟁 영화, 전투 영화가 시작한다. 각자의 세계와 공간을 지키기 위한 인간들의 대결이다. 장소가 바뀌고 장르의 이미지를 시각화했다고 해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승리호>의 '한국형'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간 우리는 '한국형'이라는 카피를 종종 접했다. 그때마다 드는 의문은 도대체 '한국형'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한국에서 제작했다거나 한국 배우가 출연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실패한 마케팅일 것이다. 아니, 실패한 마케팅이어야 한다. 그 수식어를 사용하려면 한국 영화만이 갖는 독자적 특징을 말할 수 있어야겠다. 그러나 <승리호>는 과연 그 특징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나의 지식만으로 '한국형'이라는 특징을 규정할 수 없거니와 감히 그 틀을 정의 내릴 수는 없겠지만, 이 영화는 한국적인 어떤 것을 담고 있지 않았다.
만약, '한국형'이라는 것이 태호-순이의 가족주의적 성격에 있다면, 부디 다시 한번 고민해보길 바란다. 과연 '한국형'을 그것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지.
한국 영화가 도전하지 않던 장르에 뛰어든 것에 의의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과연 장르적 이미지들의 나열만이 방법인 것인지, 독자적인 특징을 녹여낼 수는 없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 영화의 뿌리 깊은 발전이 있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