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하는 기술
'행복에 대한 물음.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작년 6월,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진 때를 틈타 우리 셋은 하회마을이 있는 안동으로 2박 3일간 여행을 떠났다.
한 친구는 싱글, 다른 친구는 남편이랑 둘이 사는 딩크족, 그리고 나는 쌍둥이를 키우면서 간간이 번역으로 용돈 정도를 벌고 있는 프리랜서였다.
거의 주부인 나를 제외한 두 친구는 모든 이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높은 사회적 위치'에 있는 친구들이다. 한 명은 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고위직 공무원, 다른 한 명은 명문대 교수였다. 글쎄, 사회 안에서 그들을 만났다면 나 또한 '나는 저들과 너무 다르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너무 다른 우리들이 여행을 떠났다. 시간이 남아도는 내가, 갈 장소부터 머무는 호텔까지 모든 여행을 계획하고, 동선을 짰다. 친구들이 만족스럽게 나의 플랜에 슬슬 따라오기만 했으니 나름 성공적인 여행이었달까.
간간이 만나서 스몰토크만 하던 그들과 2박 3일 여행을 하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한 게 그 여행에서의 나름 큰 소득이었다. 그냥 달빛이 밝았던 그날, 하회마을 근처 역사가 깊은 한 고택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현재 이야기 등 나름 심도 있는 대화가 오갔다. 농담도 주고받으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나의 마음속을 울리던 속내를 그들에게 뜬금없이 고백했다.
"참 우습다. 내가 너희들을 사회에서 스쳐 지나가듯 만났더라면, 나와는 너무나 달라 가까워질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 근데 여기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시 한번 느껴지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구나. 너와 나는 다르지 않구나. 내가 특별하다 생각하는 그 누군가도 역시 마찬가지겠지. 인간 사회가 참 우스운 것 같아."
나의 자조적인 고백 때문인지 대화는 한층 더 무르익으며 서로 현재의 감정 등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먼저 공무원 친구가 말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어.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했고, 지금의 자리를 이뤘지. 명예가 있는 직장에 다니고, 큰 집에서 살고 있고, 괜찮은 연봉에, 안전한 연금까지. 남들이 보기엔 완벽할지 몰라. 근데 나는 외로워. 그리고 나 자신한테 불만족스러워. 더 이상 혼자 있고 싶지 않아... 과거에 오래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우리가 자란 동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았어. 같이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서 여권을 만들라고 해도 만들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거든. 그때는 그가 바보 같아 보이고, 답답했어. 그냥 나처럼 야망이 있지도 않았고, 또 내가 원하는 모든 게 욕심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헤어졌어. 근데 그때 그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요즘 해."
이 친구는 정말 뭐든 열심히 한다. '요리를 할 거야.' 하면 프로 셰프처럼 했고, '정원에서 뭔가를 키워야겠어.'라고 이야기함과 동시에, 전문 농부 모드가 되어 상추, 오이, 치커리 등 별의별 작물을 끝장나게 키웠다. 지금은 운동에 빠져 살을 어마어마하게 뺀 모습을 자랑한다. 열정의 끝판왕이랄까.
교수 친구도 이어 말했다.
"나는 교수가 되기까지 얼마나 집요하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는지 몰라. 세상에 그 많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지. 행복할 줄 알았어. 근데 교수가 되어서도 나의 기준이 너무 높아서 무엇을 하든지 몸을 혹사시키며 열심히 해. 그리고 좋은 결과가 나와도 그다지 그 결과에 만족하지 않아. 나의 기대치가 너무 높은 가봐. 이젠 조금 쉽게 살고 싶은데 내가 살아왔던 방식이 이랬으니 앞으로도 변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들의 고백을 들으며 나의 내면에서는 뭐랄까,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 일었다. 저들은 내가 동경하는 사람들인데. 모든 것을 갖추고, 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부류. 주부로 있으면서 내가 꿈꾸고 동경하던 친구들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정말 놀랄 노자였고,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일생 열심히 산 적이 없어. 늘 내가 가진 것에 만족했거든. 학창 시절 성적이 좋을 때나 나쁠 때,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만족했어. 현재 번역으로 버는 돈도 얼마 안 되지만 그것에도 감사하고 만족해. 나는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이야. 너무 쉽게 가진 것에 만족하거든. 그렇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보다 행복지수는 월등히 높은 것 같아. 그리고 그게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해."
...
나는 무엇인가에 열정이 있던 적이 있던가. 무엇을 얻고자 최선을 다해서 후회 없이 노력을 해본 적이 있던가. 여행에 꽂혀 미친 듯이 세상을 방랑했던 적은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나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한 열정이었지, 성공이나 야망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삶을 뒤돌아 봤을 때 내가 만약 조금만 더 노력하고 열정을 바쳤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과거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가진 것에 아주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기 때문.'
여행에서 돌아온 날 저녁, 로버트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행복도가 높은 게 만족을 잘하기 때문이라는 거. 물론 그게 나를 게으르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분명해. 그래도 행복하잖아.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거. 그게 나한테는 중요한 거 같거든. 이번 여행을 통해 만족하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란 것을 깨달았어. 우리 아이들이 나의 부족한 끈기와 게으름은 닮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치만 만족하는 법은 꼭 닮으면 좋겠다. 애들에게 그 기술만큼은 꼭 알려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