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아몬드'

'우리 모두는 존재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by 한나Kim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가 있기에 무심히 빌려왔다. 사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몰랐다. 그저 '아몬드'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만 간간히 들었을 뿐이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책을 펼쳤다. 읽다 보니 주인공인 '윤재'가 감정과 공감능력이 부족한, 일명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든 인간의 뇌에는 아몬드 크기의 편도체가 두 개씩 존재하며, 인간은 이 편도체를 통해 다양한 감정과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윤재는 편도체의 크기가 작고 활성화가 잘 되지 않아,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아이였다.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그의 내레이션을 따라 읽다 보니, 나 역시 점점 감정이 말라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61쪽 그의 할머니와 엄마가 묻지마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장면조차, 그의 시점으로 쓰인 글을 읽으면서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잔혹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무채색처럼 담담하게 다가온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P61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엄마와 할멈에게서 멈췄다. 그가 방향을 틀었다. 할멈이 엄마를 잡아끌었다.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남자가 엄마의 머리 위로 망치를 내리찍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엄마가 바닥에 피를 흩뿌리며 나동그라졌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밀었지만 할멈이 소리르 지르며 몸으로 막아섰다. 남자는 망치를 땅에 떨구곤 다른 손에 쥔 칼로 공기를 몇 차례 벴다. 나는 유리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할멈은 고개를 저으며 온 힘을 다해 문을 막았다. 할멈은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내게 무언가를 반복해 말했다. 그러는 동안 할멈의 뒤로 남자가 다가왔다. 뒤를 돌아 남자를 본 할멈이 커다랗게 포효했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이었다. 할멈의 거대한 등이 내 눈앞을 가렸다. 유리에 피가 튀었다. 빨갛게, 더 빨갛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점점 더 빨개지는 유리문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할머니는 즉사를 하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17살인 윤재는 그렇게 혼자만의 생활을 시작한다. 감정이 있는 인간에게는 이 상황이 무척 비참하겠지만, 윤재는 고통스럽지 않다. 친구들이 그에게 다가와 할머니가 죽는 모습을 봤을 때 어땠냐고 물을 때도 그의 답변은 여전히 건조하다. "아무렇지도 않아"


비극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는 윤재를 바라보면서도 그에게 연민이 일지 않는다. 고통 없는 그의 무감정이 나에게도 전해지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어떤 상황에서건 평정심을 유지하는 윤재는 사실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던 어느 날,

'감정 없는 괴물' 윤재 앞에 '극단적 양가감정의 괴물' 곤이가 나타난다.



곤이는 교수인 아버지와 유능한 기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던 그는, 어느 날 어머니가 잠시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 놀이터에서 실종된다. 중국인 노부부에게 납치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아동 보호 시설을 거쳐 입양이 되지만, 2년 만에 파양 당하고 다시 시설로 돌아온다. 그렇게 어둠 속에 방치된 채 살아가던 그는 결국 소년원을 들락거리는 아이로 성장한다. 그렇게 자라다 교양이 철철 넘치는 친아버지, 윤교수를 다시 만난 것이다.



감정이 없는 윤재와 극단적인 감정을 안고 사는 곤이는 처음엔 악연으로 만난다. 곤이는 윤재를 겁박해 굴복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때리고, 욕하고, 괴롭혔으나, 감정과 공포심이 없는 윤재를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할머니를 죽인 '살인자의 마음을 알고 싶었던 윤재'와, '생각과 감정이 없어지길 바랐던 곤이'는 서로에게 호기심을 느끼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신기한 점은 곤이의 잔인했던 행동이, 감정이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윤재의 내레이션을 통해, 점점 더 선함으로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윤재의 글을 통해서 사실 곤이는 너무나 연약하고 착한 아이인 것이 계속해서 드러난다. 풍파가 많은 세월을 살아왔기에 껍데기만 강한 척하는, 그저 남한테 짓밟히지 않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면서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깨부술 수밖에 없는 그런 가여운 아이.


사실 곤이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는 '한 명', 딱 그뿐이었다. 너무나 외로운 아이였던 것이다.



P215-217

-근데 말이야. 한 가지만 묻자.

곤이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나라고 생각해?

마침내 곤이가 용건을 꺼냈다.

-난 여행을 가지도 않았어.

-대답만 해. 나라고 생각하냐고.

-가능성을 묻는 거야?

-그래. 가능성. 내가 했을 가능성.

-솔직히 말하라면, 다들 너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하진 않아. 넌 그렇게 생각할 만한 요소가 많으니까. 너 말곤 그럴 만한 사람이 잘 안 떠오를 거야.

-그렇구나. 그럴 것 같았어. 그래서 고집 안 피웠어. 한 번 말했거든, 내가 한 거 아니라고. 근데 소용없더라고. 입 아플 거 같아서 가만있었는데, 아빠라는 작자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돈을 바로 갚아 버리데. 몇십만 원은 됐을 텐데. 그런 아빠 둔 거 자랑스러워해야 되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곤이도 한동안 입을 꾹 다물었다.

-근데, 나 안 그랬다.

말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나 말이야, 그냥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대로 살아 보려고 해. 사실 그게 내가 제일 잘 아는 거기도 하고.

-무슨 말이야?

-말했잖아, 난 강해지고 싶다고. 그래서. 강해질 거야. 내가 살아온 인생답게. 나한테 제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기고 싶어. 상처받는 걸 멈출 수 없다면 차라리 상처를 줄 거야.

-앞으로는 볼 일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자, 작별의 뽀뽀 대신 이거.

곤이가 눈을 찡긋하더니 가운뎃손가락을 슬그머니 올렸다.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 애의 얼굴에서 그런 웃음을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그 애는 사라졌다.



P222-223

눈물이 교수의 목을 타고 흘러 스웨터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나중에는 울음소리에 묻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따뜻한 코코아를 한 잔 타서 앞에 내밀었다.

- 넌 이수(곤이)랑 꽤 가까이 지냈다고 하더구나. 우리 집에도 한 번 찾아왔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그런 일을 당하고도.

윤 교수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답을 내놓았다.

- 곤이는 착한 애니까요.

-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알고 있다. 곤이가 착한 아이라는 걸. 하지만 구체적으로 곤이에 대해 말하라면 그 애가 나를 때리고 아프게 했다는 것, 나비를 찢어 놓았다는 것, 선생에게 패악질을 부리고 아이들에게 물건을 집어던졌다는 것밖에 말할 게 없다. 언어라는 건 그랬다. 이수와 곤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거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알아요. 곤이는 좋은 애예요.

내 말에 윤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삼 초쯤 유지되다가 갑자기 무너졌다. 그가 또다시 울어 버렸기 때문이다.

- 고맙구나. 그렇게 생각해 줘서 말이야.

- 그런데 왜 우세요?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게 미안해서. 그리고 그 애를 착하다고 말해 주는 걸 고맙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이 얼토당토않아서....



P225

새벽녘이 되도록 의식이 또렷했다. 곤이한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 네 OO 앞에서 아들인 척해서. 내게 다른 친구가 생긴 걸 말하지 않아서. 그리고 너는 안 그랬을 거라고,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곤이를 찾아야 했다.



이렇게 사라진 곤이를 찾기 위한 윤재의 아름다운 여정이 시작된다. 어찌 보면 잔인하지만, 감정 없이 내뱉는 말들 덕분에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따뜻한 여정이다.


감정이 없는 윤재도,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살면서 남들을 해코지하는 곤이도,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름답다. 이 책은 어찌 보면 청소년 성장소설인 듯하고, 또 어찌 보면 어른을 위한 아름다운 동화 같기도 하다. 어쨌든 소설을 읽은 후에 그 여운이 꽤 오래 남는다.


아름다운 소설을 나만 읽기가 아쉬워서 둥이에게도 읽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싫다고 하더니만, 한 번 읽기 시작하더니 이틀 만에 완독. 만 11살 아이에게도 공감이 잘 되고, 쉽게 읽히는 책이다.


...


지금 자신의 마음이 메말랐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권한다. 감정이 없는 윤재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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