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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벽의 끝, 결혼 (25)

'위풍당당,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by 한나Kim

2010년 2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가 한국에 돌아왔다. 물론 기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 1년을 산다는 게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런 리스크를 감당해도 되나 싶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국인라면 이런 감성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한다. 특히 한국 남자는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피 튀기게 살아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 만큼, 가슴이 시키는 일을 무작정 실행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한국은 딱딱하고, 경쟁적이며, 또 남의 이목을 중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너 곧 서른인데 어딜 가? 여자 만나려고? 다른 애들은 다 직장 잡고 저금한다. 결혼해야지. 조금만 더 늦으면 괜찮은 직장 못 구해. 남들이 시작할 때 시작해야지. 자리 잡아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야지.'


안 봐도 비디오다. 오지랖의 사회, 무슨 말을 하든지 미래 걱정부터 해서 시도조차 못하게 하는 대한민국이 아닌가. 그뿐이랴? 사람들의 이목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교사회. 평범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까이는 딱딱한 사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나라, 내 조국이 정말 좋은 부분도 많지만, 여전히 어려운 부분도 많다.


반면, 독일은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나라이다. 나치 시절 때 모두가 생각 없이 히틀러를 추종했던 역사가 독일인들의 잠재의식 속에 트라우마를 남겼다고 한다. 그때 이후로 '한 사람의 의견', 또는 '주류 여론'을 추종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어, 지금은 일의 진척이 너무 어려울 정도로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노력하는 사회가 됐다고 한다. 말만 들으면 너무 멋지다. 모두를 존중하는 사회라. 그런데 막상 이런 상황에 닥쳐보면 숨도 안 쉬어질 만큼 답답하다. 예를 들어보겠다.


독일에서 요하네스 친구들과 카약 투어를 했을 때의 일이다. 13명의 사람들이 캠핑장에 도착하여 어디에 텐트를 칠 것인가를 정하는데, 거짓말 안하고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솔직히 이게 회의를 통해 결정할 사항은 아니지 않나? 대충 괜찮아 보이는 곳을 정해서 "여기다 치자!" 하면 될 일이 아니냔 말이다.


독일은 달랐다. 13명 중에서 8명은 평편한 곳에 치자고 하고, 3명이 나무 밑에 치자고 했으며, 나머지 2명은 어디든 상관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 한국인이라면 대충 다수결로 평편한 곳에 치고 빨리 저녁을 준비하거나 놀거나 할 것이다. 그들은 8명의 다수가 반대 의견을 가진 3명을 설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때 설득당하는 3명은 1시간 정도가 지나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마음으로 '그래 평편한 곳에 치자'라고 해주면 좀 좋겠는가? 그들은 끝까지 그러지 않는다. 이런 복장 터지는 상황에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 신기하다.

보고 있으면 환장할 노릇이다ㅠ 1시간이 지난 후 어떻게 됐는가? 결국 3명만 나무 밑에 텐트를 치는 걸로 결론이 났다. 그냥 처음부터 따로 치면 되잖아? 보고 있으면 진짜 복장 터진다.


...


요하네스는 한국으로 온 첫 3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서울대 어학당을 다녔다. 그런데 웬일인가. 같은 반에 요하네스와 같은 상황인 외국남이 2명이나 더 있네. 허허허. 이 두 명도 한국인 여자친구를 위해 고국에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에 온 남자들이었다ㅎㅎ



그가 온 후, 첫 달은 약간의 거리를 두며 만남을 가졌더랬다. 자주 만나길 원하는 그였지만, 신림동과 내가 사는 곳이 너무 멀었고, 직장인이라 시간이 많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 자주 보면 그의 기대치가 높아져 싱가포르에서 만났을 때처럼 더 많은 것을 요구할까 싶은 두려움도 있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오버해서 너를 만나 내 이가 흔들리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라는 나의 의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한 달이 많이 외로웠을 거라 생각한다.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일부러 살피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그가 나를 지긋이 그리고 아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너만 기다리면서 이 낯선 나라에서 계속 혼자 있어야 된다면, 나는 아마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독일로 돌아가게 될 거 같아."


그 말을 듣는데 뭔가 가슴에 쿵 떨어지는 느낌. 그의 눈빛이 너무 솔직했고, 또 진실됐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을 보니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 자리에서 바로 사과를 했다. 눈물도 줄줄 흘리면서 말이다.


'너를 외롭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 노력할게.'


...


약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요하네스도 어학당 친구들과 친해지며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들과 어울리며 2010년을 진심으로 유쾌하게 보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참으로 자유롭고, 순수했고, 즐거웠던 시간들.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은 브라질에서 온 교포男, 그의 베프 브라질男, 한국인이랑 결혼한 필리핀女, 태권도 유단자라 한국을 알고 싶어 온 독일女, 한국 여친 때문에 무작정 따라온 호주男과 터키男 그리고 한국을 사랑하던 대만女까지.


요하네스와 연애하는 대부분을 저들과 함께 했기에, 그들은 여전히 우리의 추억 속에 소중하게 남아 있다.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런 인연들이 우리의 삶을 더 향기롭고 오색찬란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늘 한다.


...


3개월이 지난 후, 요하네스는 신림동에서 나와 한양대 근처에 원룸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원룸을 보는데, 왜 이리 비싸고 또 방은 어찌나 작은지. 둘 다 굉장히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발품을 팔아 겨우겨우 방을 구해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글쎄 보증금 500만 원이 없다네요?ㅇ_ㅇ


아무리 사회보장이 잘 되어 저금이 필요 없는 나라에서 왔다고 할지라도, 어찌 나이 20대 후반에 500만 원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 500만 원은 결국 내 통장에서 빠져나왔고, 그가 매달 나한테 50만 원씩 갚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가 결혼할 때 그가 '500만 원'은 준비할 수 있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이 글의 결론이다.


잠깐 눈물 좀 닦고 올게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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