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 편안함에 젖어든 그와 나.'
얼떨결에 프러포즈를 받은 후, 그는 어딜 가나 나를 "My fiance"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물론 그와 결혼을 생각하며 만났던 것은 맞지만 100프로 확정된 느낌은 없었다. 어차피 그는 1년 후에 독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다시 말해 내가 한국에 있고, 그가 독일에 있는 동안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 단짝들한테는 그를 공개했지만, 그 외 사람들, 특히 표면적인 회사 동료한테는 오픈을 하지 않았다.
근데 웬일인가. 한국이 얼마나 좁은지, 어딜 가나 회사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의도 벚꽃 축제에서도 그 많은 인파 중에서 한 명을 만났었고, 그의 자취방 근처에서 둘이 걷고 있을 때에도 회사 상사를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희한하다. 무엇이든 감추려고 하면 할수록 더 드러나는 것이 비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2010년 6월 중순, 남아공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축구라면 지금도 환장하는 그이기에, 그 기간 동안 어학당 친구들과 한국 축구 경기를 보러 다니며 참 유쾌하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은 그가 독일 친구들과 만나서 논현동에 있는 펍에서 독일 경기를 볼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당일, 친구들이랑 만났다고 전화가 왔기에 "재미있게 보고와" 하고 끊었는데, 곧바로 내 유딩 친구인 강양이한테 전화가 온 것이다.
"나 지금 논현역 근처인데, 요하네스가 두 명의 여자랑 걷고 있어."
"오우 걱정마소! 둘 다 아는 친구야. 다 같이 축구 보러 펍에 가는 중ㅎㅎ"
"혹시 너 모를까 봐 전화했지ㅎ 오키!"
서울이 좀 넓습니까.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순간마다 꼭 이런 '밀고자' 또는 '우연한 만남'이 생기자 그가 진심 놀랐던 것 같다. 사실 나도 놀랐다 ㅇ_ㅇ
그래서인지 그가 독일 여자 친구로부터 한국에 놀러 오고 싶다는 이메일을 받았을 때, 그녀에게 한국의 남녀칠석 부동석 문화를 설명하며 네가 오게 되어도 나는 너랑 놀러 다닐 수 없는 건 물론이오, 자기 집에서 재워줄 수도 없다. 이래도 좋으면 오라는 메일을 보냈다. 물론 그녀는 오지 않았음 ;;
이뿐이 아니다. 어쩌다 알게 된 한국여인이 그에게 서울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만나자는 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가 그걸 받자마자 화들짝 놀라서 나에게 공개를 한 후, "혹시 나의 코리안 피앙새랑 같이 나가도 되니?"라는 답변을 보냈다. 물론 그녀에게도 답변은 오지 않았음ㅋ
여차하면 차일 수 있다는 이전의 학습효과(?) 덕분인지, 아니면 산지사방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는 내 친구들 덕분인지, 그는 자기가 처신을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가는 나랑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어쨌든 한국에서의 그의 태도는 독일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
한국에 있는 1년 동안, 요하네스가 잠깐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출장을 갔던 적이 있다. 거기서 일이 잘 안 풀렸는지 풀이 완전히 죽어서 한국으로 돌아왔었다.
남자란 동물의 특징인지, 아님 독일남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자신감이 한 번 떨어지니까 아주 바닥을 모르고 추락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에는 "나는 이 일이랑 안 맞는 거 같아."라는 결론에 도달한 그를 보며 엄청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학벌도 그저 그렇고,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성실하지도 않다. 게다가 지금까지 뭐 하나 이룬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인간. 그렇지만 보통의 한국인에게서는 보기 힘든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바로 '근자감 (근거 없는 자신감)'과, '극단적인 긍정성'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요하네스는 똑똑하고 유능하다. 게다가 근면성실하며, 주어진 일은 늘 결과를 내는, 나랑은 정 반대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저렇게 끝도 없이 곤두박질치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내가 너라면 완전 설치고 다녔을 거 같은데??'
추락하는 그를 보다가 한 마디를 했다.
"살면서 나랑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지. 그런데 꼭 그 사람이 옳고 네가 그른 게 아닐 수 있어. 네가 틀렸거나 일을 못하는 게 아닐 거란 말이지. 그냥 너랑 의견이 다를 뿐이야. 너 지금까지 즐겁게 일했잖아? 한국에 와서 나랑 맨날 놀면서도 얼마나 잘하고 있어? 아무것도 아닌 사람 때문에 신경 쓰지 마. 내가 보기에 이 일을 너보다 잘할 사람은 세상에 없어."
넌지시 그렇지만 분명한 어조로 그에게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그의 얼굴이 꽃처럼 피는 게 보였다. 고통이 가득했던 눈에 하트가 뿅~하고 나타나는 것도 보였다. 그때 그의 눈을 보면서 '나는 무조건 요하네스랑 결혼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요하네스가 남아공에 다녀오며 나에게 2개의 선물을 주었다. 성인남 주먹 크기 정도의 돌(?)로 만든 지구본(?)과 원석으로 만든 목걸이였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데도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지구본이라니, 그것도 돌로 만든.. 한 2-3Kg 될라나? 실수로 발에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발이 아작 날 정도의 무게였으니까. 목걸이는 또 어떤가. 짚으로 만든 옷을 입고 창을 들고 다니는 원시인들이 차고 다닐 것 같은, 빨간색 줄로 얼기설기 엮인 원석 목걸이였다 ;;
그 선물을 받으면서 싱가포르에서 친했던 언니가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중동 항공사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싱가포르에 일을 구하러 왔던 내 고객이었는데, 둘이 친해져서 자주 만났었다. 그녀가 요하네스를 보고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예전에 괜찮은 독일남이랑 썸을 탄 적이 있었는데, 그 남자가 정말 좋은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결국에는 시작을 못했어. 나는 이미 명품 선물로 도배를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거든. 그가 주는 꽃 한 송이에서 진심을 느꼈지만, 그와 시작하기엔 내가 너무 자본주의의 맛을 알아버린 거지. 나 자신이 속물 같아서 슬펐지만 어쩔 수 없어. 너는 잘해봐. 요하네스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렇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독일인에게는 진심이 있다. 돌로 만든 지구본이 진심이 아니고서야 어찌 살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희귀 아이템이 아니던가ㅎ
...
인간은 결국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준으로 현재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사람의 진심만큼이나 물질도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했던 그녀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기준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누군가가 내 기준에 안 맞는다고 해서 그르다 할 수 없고, 또 내 기준에 맞다고 하여 옳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깔끔하게 다름을 인정하면 된다. 나처럼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