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편안한 날들.'
한국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다. 다름을 '이상함'이 아닌, 그저 '다름'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날들이 지속되던 여름이었다. 둘이서 상주에 놀러 갈 계획을 세웠다. 요하네스가 싱가포르에서 세 들어 살던 가족이 우리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방문 날짜를 정한 후부터 이모님과 그녀의 아들들이 우리가 오는 날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상주 여행이 이제 4일 정도 남았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요하네스가 상주 대신 보령 머드축제에 가자고 하는 것이다.
"어학당 친구들이 이번 주말에 머드축제에 간대. 나도 친구들이랑 보령에 가고 싶어. 상주는 언제든 갈 수 있으니까 그곳은 취소하자."
보령 축제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어학당 친구들에게 머드축제를 소개 후 같이 가자고 한 것이 나였다는 사실이다. 다음 주에 가자고 제안을 했는데, 독일 태권도녀가 자기는 다음 주까지 못 기다리겠으니, 무조건 이번 주에 가겠다고 한 것이다. 세상에나.
요하네스가 그녀에게 사정에 사정을 하며 이번 주에는 우리가 못 가니 다음 주에 같이 가면 어떠냐고 설득에 설득을 해봤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녀가 요지부동이니 다른 친구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가끔씩 이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독일인에게 양보라는 개념이 과연 있긴 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그들은 양보를 하면 진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나로서는 진짜 이해가 안 되지만, 문화가 다르니까 그냥 받아들여야지 뭐.
솔직히 나도 보령머드축제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 아니던가. 약속을 취소할 거면 적어도 2~3주 전에 해야지, 달랑 3~4일 남겨놓고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머드축제를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요하네스는 '무조건 보령!'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날 늦은 밤까지 전화로 미친 듯이 싸우다가 나 혼자 소리를 버럭 지른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렇게 태권도녀가 좋으면 그녀랑 사귀던가. 아무튼 난 혼자라도 상주에 갈 거니까 나랑 헤어지고 너 혼자 보령에 가든지 해."
좀 극단적이긴 하다ㅋ
그렇게 폭발을 한 후 전화를 끊어버린 여친이 무서웠는지, 요하네스는 다음날 아침, 내 회사 앞에서 '바나나 우유'를 한 통 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바나나 우유다. 이제는 한국인을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빙그레 바나나 우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상주가 아닌 보령머드축제에 갔어야 했다. 젊음이 반짝거리는 시절에는 친구들이랑 놀 수 있을 때, 무조건 놀아야 한다는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 순간이 이렇게나 찰나일 줄 나는 몰랐지.
혹시라도 그 순간이 다시 온다면, 이모님과 그 아들들의 실망감을 생각하며 결정하는 우(愚)는 절대 범하지 않고, 무조건 보령으로 갈 것이다. 내가 아닌, 남의 기분을 살피며 선택했던 것들은 결국 의미 없고 부질없게 느껴진다.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 나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자. 둥이는 이런 순간에 남보다는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을 때에는 둘이서 차를 렌트해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가을의 여행은 나의 뇌리에 아무런 인상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영월의 강이 예뻤다는 것과 영월에서 단체로 놀러 온 어르신들이 우리에게 바비큐를 구워서 줬던 따뜻함만 남아있다.
사람이든, 일이든, 아니면 여행지든, 새로운 무언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초반에 뿜뿜 나오던 아드레날린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와의 일상이 익숙해진 나에게, 그는 좋게 말하면 안정감을 주는 존재, 나쁘게 말하면 더 이상 아드레날린이 나오지 않는 존재가 된 것이다. 대신 나를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일 수 있는 편안한 사람이 되었다.
멕시코에서 만난 인연으로 시작된 우리의 사랑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색무취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실, 삶의 태도와 방식을 확 바꿔버릴 듯했던 자극적인 그와의 관계보다는, 오래된 친구같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관계가 더 좋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가 한국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딱 2개월 남은 어느 날이었다. 그의 마음이 조급했는지, 예식장을 알아보자는 보챔이 시작되었다.
'예식장?? 생각지도 못했는데..' 싶으면서도, 그가 떠나기 전에 예식장을 잡아야 일이 진척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의 결혼식을 보면서 스드메에 옵션이 너무 많은 것을 보았기에 나는 간단하게 전통혼례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 국제결혼은 전통혼례가 국롤이기도 하다만 ㅎㅎ
우리는 그 주 주말에 나라에서 운영하는 '한국의 집'을 방문했다. 보는 순간, '너무 괜찮은데?' 싶었기에 바로 이곳에서 결혼하기로 결정.
전통혼례로 결혼을 할 거라는 딸의 통보에 굉장히 실망하던 엄마였지만, 엄마 또한 그곳을 방문한 후 마음에 들어 했기에, 바로 다음 해 9월로 날을 잡았다.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아주 자연스럽게 결혼 날짜를 잡은 후, 그는 독일로 돌아갔다. 이제는 공항에서 울지 않을 법도 싶은데, 그는 이번에도 인천공항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출입국장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나는 공항에서 운 적이 한 번도 없음. 그저 우는 그대를 바라볼 뿐ㅋ
이제 7개월간 그를 기다리면 된다. 늘 그렇듯 시간은 잘 흐를 테니까. 곧 전통혼례를 치르는 새색시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우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