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결국 모든 것을 스스로 정한 인생이다.'

by 한나Kim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정말 우리의 모든 것이 소멸되면서 사라질까?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물리학의 기본 원리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사실 나는, 우리가 전 생애에 걸쳐 경험하는 모든 순간들이 강력한 빛과 소리 그리고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과 동시에 그 강렬한 에너지가 0으로 수렴되어 사라지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헛소리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이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물음이 우리를 철학으로, 종교로, 그리고 사후세계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 싶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은 이런 사후세계의 궁금증을 표현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희곡으로 쓰여있어 빠른 템포로 읽히면서도, 중간중간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겠지만, 종교•철학•사후세계•전생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


판사였던 주인공 '아나톨 피숑'은 폐암 수술을 받는 도중 사망한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천국의 법정에 들어선다.


법정에는 아나톨을 변호하는 카롤린, 그가 생전에 잘못한 것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베르트랑, 그리고 양측의 이야기를 들은 후 심판을 주관하는 가브리엘이 나온다. 다시 말해 카롤린은 변호인, 베르트랑은 검사, 그리고 가브리엘은 판사라 할 수 있다.


위 3명의 인물은 ‘아나톨’이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변호•검증•심판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삶을 파헤친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사후 심판을 권선징악의 판별로 떠올리는 것과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를 읽으면서 삶을 바라보는 한국인과 프랑스인의 시각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P111-115

그가 리모컨을 눌러 결혼식 사진을 스크린에 띄운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무척 뚱뚱한 여성 옆에 턱시도 차림의 피숑이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다.


베르트랑: 그렇습니다, 재판장님, 피숑 부인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아무리 봐도.... 그녀의 외모를 보세요.

카롤린: 피숑 부인은 패션 잡지들이 기준을 정해 놓은 미인에 해당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경멸스러운 듯 입매를 비틀며) 잡지 표지에 나오는 거식증 걸린 열여섯 살짜리 러시아 모델이 아니죠!

아나톨: 미의 개념은 주관적인 거예요. 당신들 천국 사람들 치고는 몰상식하군요. 게다가 사람을 판단할 때는 외모가 아니라 품성을, 그 사람의 영혼을 봐야죠. 이 얘길 내가 당신들한테 해줘야 하다니 원!

베르트랑: 재판장님, 피숑 씨가 알아야 하는 게 있습니다. 우선 천생배필인 사람을 배우자로 고르려는 노력을 했어야죠. 피숑 씨는 자신과 어울리지도 않는 상대에게 충실했어요(?) 더군다나 그 둘은 서로에게 권태를 느끼면서도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그가 부정을 저지르는 게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카롤린: 이의 있습니다. 검사는 혼외정사를 옹호하고 있어요!

베르트랑: 그러다 보니 전통적 가치와 관습이라는 미명하에 피숑 내외는 지극히 기본적인 쾌락을 스스로 차단했습니다. 바람을 피워 부부 관계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하지 않았죠(?)

카롤린: 이의 있습니다!

가브리엘: 기각합니다. 계속하세요.

베르트랑: 이것은 도덕의 차원이 아니라, 상식의 차원입니다. 우리한테 달린 성기는 쓰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이 과연 생길까요, 저라면...



부부의 권태를 위해 바람이라도 피웠어야 한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있나 싶었다. 그러나 책을 계속 읽다 보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나온다.



P122-128

베르트랑: 불행한 아내, 방치당한 아이들, 날림 판결의 피해자들, 풀려난 범죄자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피고인의 말마따나 <경범죄>에 불과해요. 제 최고의 카드는, 피고인한테는 최악이 되겠군요. 바로 피숑 씨의 최대 피해자 말입니다.

아나톨: 그게 누군데요?

베르트랑: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그 자신입니다.

아나톨: (머리를 굴리며) 아, 하루에 담배 세 갑 피웠다고 또 탓하는 거예요?

베르트랑: 그게 아니에요, 피숑 씨, 담배가 아니라 재능 얘기예요.

아나톨: 재능이요?

베르트랑: 연극, 연극 말이에요! 피숑 씨의 사건 서류를 꼼꼼히 검토해 보았습니다. 신속하면서도 꼼꼼하게, 고등학생 시절에 아나톨 피숑은 연극반을 만들었어요. 수많은 작품을 공연했죠. 그는 무대에 오르는 순간 딴 사람이 됩니다.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죠. 박수갈채가 쏟아졌어요.

아나톨: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연극을 사랑하는 게 뭐 잘못이라도 되나요?

베르트랑: (돌연 정색하며) 되죠, 당신이 그걸 직업으로 삼지 않은 게 바로 잘못이에요.

아나톨: 배우 말이에요?

베르트랑: 당신은 배우가 되는 완벽한 길을 갈 수 있었어요. 당신은 최고가 될 수 있었어요! 피숑 씨, 당신은 배우자를 잘못 택했고, 직업을 잘못 택했고, 삶을 잘못 택했어요! 존재의 완벽한 시나리오를 포기했어요.... 순응주의에 빠져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했죠. 당신에게 특별한 운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염라대왕(판사) 앞에서 베르트랑 검사는 말한다. 아나톨은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남들과 똑같이 현실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유죄'라고 말이다.



P129-132

베르트랑: 종합해서 말씀드리죠, 연기라는 직업적 소명을 외면함으로써, 피고인은 재능을 등한시한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위대한 러브 스토리 역시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위대한 러브 스토리라고 했었죠! 고등학교 시절의 연극반을 떠올려 봐요, 피숑 씨. 당신과 함께 자주 무대에 올랐던 여학생을 기억해요? 보라색... 블라우스를 즐겨 입었죠. 보랏빛 눈동자가 특징이었어요.

아나톨: 솔랑주?

베르트랑: 맞아요. 솔랑주는 당신의 나머지 반쪽이었어요. 무대에 선 그녀에게 반했었죠? 프로 배우가 된 그녀에게도 당신은 분명히 매료됐을 거예요. 그녀와 결혼했으면 매력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나이 든 솔랑주의 모습이 화면을 채운다. 그녀가 자신처럼 나이 든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


베르트랑: 솔랑주, 여전히 아름답지 않은가요?

아나톨: (고개를 푹 숙이며)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네요. 내가 다가가면 그녀가 나를 거부할 줄 알았어요.

베르트랑: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그걸 여기서는 아주 좋지 않게 보죠!

아나톨: 그때는 소심했거든요.



결국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었던 재능(직업)은 무엇이었는가? 나의 가슴을 뛰게 한 인연은 누구였는가? 그것들을 위해 나는 얼마만큼의 노력을 했는가? 가 삶의 올바름을 판가름하는 기준인 것이다



P133-134

베르트랑: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지나치게 평온하고 지나치게 틀에 박힌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등한시하고, 운명적 사랑에 실패함으로써 피숑 씨는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배신한 셈이죠.

아나톨: 하지만 나는...

베르트랑: (단호하게 잘라 말하며)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대로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너는 단 하나의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너의 재능을 어떻게 썼느냐?> 당신은 당신의 재능을 어떻게 썼죠? 전혀 쓰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형... 아니, 다시 말해 삶의 형을 구형합니다.



베르나르 작가는 소설을 통해 가장 나다운 삶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바른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순응하면서 사는 삶, 나를 희생한 채 가족을 위해서 사는 삶, 나다움을 포기할지라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삶. 이것이 올바른 삶이라 믿는다.



다행히 이 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나톨의 수호천사였던 카롤린은 그의 모든 삶을 알고 있기에, 그가 왜 가슴이 뛰지 않은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는지, 그가 왜 판사를 직업으로 선택했는지를 조목조목 이야기하며 반론한다.



P141

카롤린: 저는 우선 파숑 씨가 일개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가브리엘: 그렇죠... 그래서요?

카롤린: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가 한 선택들은 수백만의 다른 인간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브리엘: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죠?

카롤린: 잘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들이란 뜻입니다. (한 손을 뻗어 무게 다는 시늉을 하더니 다른 손으로 평형을 맞춘다) 외도보다 신의를, 거짓보다 진실을 택했죠. 그리고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결과가 불확실한 예술 분야의 직업보다 진지한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P144-147

카롤린: 검사의 논고에는 피숑 씨가 아내의 임신 후 결혼하게 됐다는 내용이 누락됐어요. 그는 아내에게 낙태를 요구하기보다 용기 있게 자신의 오르가슴을 책임지기로, 그래서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했던 거예요.

아나톨: 맞습니다.

카롤린: (서류를 뒤적이며) 스물다섯의 피숑 씨는 어느 날 밤, 뉴 블랙 파라다이스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자욱한 연기 속에 레이저가 빗발치고 음악이 쿵쾅거리는 가운데, 훗날... 피숑 부인이 될 여성을 만났어요. 피고인은 그날 밤, 그 집단 환락의 장소에서, 자제력을 상실하고 말아요. 저기 바로 저 사람이 그의 순진함을 이용한 거죠.

베르트랑: 멍청이

카롤린: 그날 밤 일로 그들의 첫 번째 아이 마리프랑수아즈가 생기게 돼요.

베르트랑: 술에 취한 상태에서 말이죠?

카롤린: 이때까지도 피고인은 여전히 직업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안쓰러운 듯) 그런데 그날 밤 생긴 아이가 다른 선택 가능성을 없애 버리고 말죠.... 아버지로서의 의무는 희생을 강요하죠. 그가 어떻게 계속 딴따라의 삶을 꿈꿀 수 있었겠습니까?

아나톨: 나는 생계를 책임져야 했어요.



가브리엘이 아나톨의 삶에 대해 판결을 내린다.



가브리엘: (법봉을 두드리며) 자, 피숑 씨... 본 재판부는 판결을 내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피고인이 자신의 재능을 망각했는가?>에 대한 답은 그렇다, 예요. <피고인이 위대한 러브 스토리를 그르쳤는가?>에 대한 답은 그렇다, 예요. <그렇다면 그것이 의식적인 행동이었는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예요. <그는 아이들을 잘 교육시켰는가?>에 대한 답은 미안하지만... 아니다, 예요. <그가 옳은 배우자를 찾았는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예요. <그는 좋은 판사였는가?>에 대한 답은 그렇다, 예요. 마지막으로 <피고인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영적인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예요.

따라서 피고인 아나톨 피숑을 삶의 형에 처합니다. 그러므로 피고인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지상의 태아로 환생해야 합니다.


가브리엘 판사가 말했다. 당신은 주어진 숙명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에 충분한 영적 성장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그래서 또다시 환생을 해야 하는 형에 처한다고 말이다.


책 마지막 장에는 아나톨이 자신의 다음 생을 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자신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모와 직업을 정하고, 더 빠른 성장을 위해 핸디캡도 장착한다. 그렇게 미리 삶을 정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톨은 부족한 부모님을 원망할 수 없고, 자신의 핸디캡을 원망할 수도 없으며, 나의 재능과 운명도 원망할 수 없다. 모두 자신이 선택한 것이 때문이다.


...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생리딩가 박진여 님이 계시다. 이 분의 이야기를 살짝 공유하고 싶다.



예전 회사 동료가, 자신의 베프가 박진여 선생님께 전생리딩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남들이 보기에는 완벽히 성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앱을 만들어 큰 회사에 넘기며 몇 십억을 받은 능력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남모를 괴로움이 있었는데,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그 어떤 지원과 사랑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직업도 튼튼했고, 겉으로는 굉장히 자상해 보였기에 그녀를 잘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너는 지원을 빵빵하게 받았잖아. 나도 너 같은 부모가 있으면 성공할 수 있었을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모님의 사랑도, 심지어 대학 학비도 전혀 지원받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그녀는 냉혈한 부모님도 힘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이런 말에도 너무나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하여 그녀는 속는 셈 치고 박진여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그 결과는 생각 이상으로 효과적이었다고. 왜냐하면 박진여 님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번 생의 사명은 홀로서기입니다."


신기하게도, 한마디로 그녀는 대부분의 괴로움이 사라졌다고 한다. 너무나 차가웠던 부모님이 알고 보니 그녀의 영적 성장을 도와주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아나톨이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폴란드 출신 알코올 중독자 부모'를 선택한 것과 같이 말이다.



지금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핸디캡은 무엇인가. 지금 나를 바닥으로 가라앉히는 운명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왜 그것 때문에 괴로운가를 생각해 보자. 덧붙여 나는 이것을 통해 과연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가를 떠올려보자.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괴로움이 한결 가벼워 질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사실 별개 없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가 무겁게 받아들일 뿐.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