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벽의 끝, 결혼 (22)
'내 나이 서른. 한국으로의 귀국'
3박 4일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한 카약투어는 허무함과 두려움만 남긴 채 끝이 났다. 많은 기대로 시작된 여행이었기에 깊은 상처를 내게 안겼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소피에게 던진 추파(-_-)도, 나를 대하던 그의 차가운 태도도 나름 넓은 마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감정을 공감하기보다는 그의 감정을 나에게 강요하는 듯한 태도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이런 태도를 가진 남자라면 내가 혹시 그와 결혼해 독일에서 살게 됐을 때, 나의 외로움을 외면할 거란 걸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을 그에게 걸기에는 결과가 너무 뻔했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이지만, 이 외에도 소소한 몇 개의 이유가 더 있다. 그가 싱가포르에 왔을 때 우리 데이트 비용의 70프로는 내가 썼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직장인이었고, 그는 연구원이었기에 버는 돈 자체가 내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이게 나의 사랑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는 독일에서 어땠는가. 이 쉐끼가 모든 비용을 정확히 반반으로 하는 것도 모자라, 나에게 미리 걷은 카약투어 비용에서 여행이 끝나고도 많은 돈이 남았건만 그걸 돌려주지도 않은 것. 지가 첨부터 더 썼으면 괜찮다. 지금까지 주야장천 반반으로 쓰다가 남은 돈도 돌려주지 않자 나의 뚜껑이 조금 열렸더랬다. 나란 인간은 하나를 주면 세 개를 주지만, 하나를 안 주면 두 개를 뺏는 사람이다. 전형적인 눈눈이이랄까.. -_-
대한민국의 문화는 어떤가. 우리는 진정한 환대의 민족이 아니던가. 나의 수많은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에 놀러 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대했다. 맛있는 삼겹살이나 한정식을 쏘는 건 기본이요 그들을 한강 공원에 데려가 짜장면도 시켜주며 배달 오토바이가 우리를 어찌 찾는지도 보여줬던 사람이다. 이런 정신으로 그가 싱가포르에 왔을 때 비용도 많이 냈음은 물론이요, 그의 장단에 맞춰주다 이까지 흔들린 나였다. 근데 남은 돈도 안 돌려줘? 휴.. 이 외에도 몇 가지 더 소소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자. 말해 뭐하겠는가 -_-
불편한 마음을 지닌 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그와 인사를 했다. 나는 인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에게 나의 결심을 말하지 않았고, 또 그렇다는 느낌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어차피 헤어질 거 그냥 몸이 멀어졌을 때 인사를 고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싱가포르로 들어갔고, 4일간 지난 1년 반 동안 살던 그곳의 짐을 정리한 후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영국, 일본, 미국, 싱가포르 등을 돌아다니며 살던 내 20대의 방랑도 이제 끝이다.
그때가 내 나이 딱 서른.
그리고 7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