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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Kim Sep 29. 2022

방랑 벽의 끝, 결혼 (23)

'다시 시작되는 한국에서의 삶, 그리고 이별.'

 독일에서 돌아와서 한국에 귀국하기 전까지, 4일간 싱가포르에 있었다. 그 기간 동안에 그의 전화를 받지 않음은 물론이요, 그의 이메일에도 답변을 하지 않았다. 헤어짐을 말하기에는 나의 몸과 마음이 편안한 내 나라에서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1년 반이라는 기간을 있었던 싱가포르였지만, 귀국을 위해 챙길게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것저것 다 정리하고 나니, 짐은 이민 가방 한 개 정도뿐. 그렇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13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경험이 내 인생에 큰 바탕이 되었음을 아직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상에 가치 없는 경험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찮아 보일지라도, 지금의 경험이 내 인생을 끝으로 몰아 설 자리를 없애는 중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서 내가 배운 바가 있고, 또 언젠가 이 경험을 요긴하게 써먹을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미국에 가기 전에 나는 강남의 5성급 호텔 예약실에서 근무를 했었다. 창문도 없는 작은 예약실에서, 하루에 몇 백통씩 전화만을 받으며 1년을 살았더랬다. 과연 이렇게 받는 전화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며 다녔다. 그런데 웬일인가. 세상을 살다 보니 어느 회사를 다니든, 어느 나라에서 일하든, 이 세상 일의 80%는 모두 전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좁고 작은 예약실에서 1년간 전화 매너와 목소리 톤을 완벽하게 트레이닝을 받은 나에게는 일단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큰 장점이 있었다. 이 경험은 영어로 전화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빛을 발했다.


 미국에 있을 때 KOTRA에서 한 달간 무료로 인턴십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한국 업체의 애견사료를 팔 곳을 찾아보라는 콜드콜(Cold Call: 무작정 관련 회사에 전화해서 상품을 홍보하고 권유하는 전화) 요청을 받았다. 미국 교포들도 힘들어하는 콜드콜이었지만, 나는 그 상황에서도 떨지 않았다. 예약실에서 근무하는 1년간 얼마나 많은 진상을 만났는가. 욕 하는 인간, 소리치는 인간, 비아냥 거리는 인간... 나의 자존감을 깎아먹던 그 인간들과의 경험이 내 인생에 이리 큰 도움을 줄 줄이야.. 진짜 요지경 세상이 아닐 수 없다. ㅎㅎ


 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상에 가치가 없는 경험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무가치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도움이 될 때가 온다는 것을 잊지 말자. 첫사랑과의 헤어짐 때문에 괴로운가? 회사 일로 내 자존심이 깎여서 살기 싫은가? 사랑하는 가족이 하늘나라로 가서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겠는가? 투자 실패로 내 인생의 끝자락에 와있는 느낌이 드는가? 여행 중에 여권을 도둑맞아서 걱정이 태산인가? 걱정 말길. 지금의 일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 줄 것이고, 이 모든 경험이 나의 인생에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기에.


 "인생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


 싱가포르에서 만날 사람을 다 만나고, 짐을 모두 정리한 채 드디어 귀국을 했다. 하나뿐인 외동딸의 방랑을 늘 지켜보기만 했던 부모님은 이제 한시름을 놓은 듯했다. 나 또한, 방랑할 만큼 해봤고, 경험하고 싶은 것들은 다 경험하고 귀국을 하니, 남은 미련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후회 없는 20대였다고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한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로버트에게 답변 메일을 쓰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2주 좀 넘게 너와 함께 했던 순간은 좋았지만, 우리의 미래를 꿈꿀 수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어. 그 이유는...  그러므로 우리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만 헤어지자.'


...


 답변 메일을 보내고 엄마 아빠랑 같이 가장 먹고 싶었던 순댓국을 먹으러 갔다. 싱가포르에는 웬만한 한식은 다 있었으나, 순댓국은 없었다. 얼마나 그리웠는지! 이야기 꽃을 피우며 맛있게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이 펑펑 났다.


 "지금 로버트가 내 메일을 읽고 있나 봐.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어.."라고 말하며 펑펑 울었다. 그리고 "사랑이 핑크빛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회색빛이었어. 마음이 아프고 슬퍼.. 그리고 그한테 너무나 미안해.. "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도 같이 울었다. 아빠는 조용히 드시기만 했다. 순댓국을 먹으며 가족 드라마를 찍은 듯하다. 왜 하필 순댓국집이었을까.. 지금 이야기하니 우습지 사실 그때는 세상 진지했지.. -_-


  그날 새벽 1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로버트입니다. Let me talk with Hanna"  

 "한나 지금 자요."

 "Let me talk with Hanna"

 "한나가 받기 싫다고 하네요."

 "Let me talk with Hanna"


 ...


 영어로 계속 말하는 로버트와 한국어로 답변하는 엄마. 그는 나와의 통화를 한참 시도하고 안된다는 것을 안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도 몆  번 더 전화가 왔다.


 '솔직히 이 상황에 전화를 받아서 무슨 말을 하겠어. 이미 끝났는데.. '



 미련을 가져봐야 서로 힘들 뿐, 이득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나는 알았다. 왜냐하면 나란 인간은 사랑에만 뛰어들기에는 생각과 걱정이 너무나 많은 초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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