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Kim Oct 18. 2022

방랑 벽의 끝, 결혼 (24)

'연인에서 다시 e메일 친구로...'

 그는 기를 쓰고 나랑 통화를 하고 싶어 했고, 나는 기를 쓰고 안 받으려고 하는 일이 반복됐다.


 '전화를 받아서 뭐를 하겠니. 너는 울고, 나는 마음이 아프고. 어차피 만날 수도 없는데.. 전화로 무슨 오해를 풀겠어. 백번을 해봐라, 내가 받나. 그리고 설사 통화를 한다고 해도 내가 흔들리겠니. 내 인생이 걸린 일인데. 너도 잘 정리해.'와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어찌 보면 어차피 안될 거 그 사람의 마음을 흔들지 말자라는 나의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연락을 지속하고 싶어 하는 그였기에, 그냥 e메일로만 연락을 하기로 했다.


 근데 글이란 놈이 참으로 요상하다. 마음이 뜬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글을 주고받다 보면 관계가 더 깊어지고, 또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글의 매력이자 힘이 아닐까 싶다.


 글은 나를 한없이 솔직하게 만든다. 그리고 얼굴을 보면서는 쉽게 나오지 않는 생각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쓰게끔 한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뜬금없이 급 무겁고 진지한 사람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성향이 어찌 대화를 통해 나올 수 있겠는가. 이런 성향은 편지를 쓸 때 더 자연스럽게 나오는 듯하다.


...


 한국에 부푼 기대를 안고 돌아온 나는 모든 게 잘 풀릴 거라는 희망으로 꽉 차 있었다. 세상 어디를 가든 직업을 척척 잘 구했던 나였기에, 한국에서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경기가 확 꺾인 시기이기도 했지만, 30살에 방랑만 하다 온 나를 그리 좋게 생각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나는 좌절을 맛봤다.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서류 통과 후 면접까지 가도 마지막에는 늘 떨어졌다. 그게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 같다.


 나의 이런 걱정스러운 마음을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버트뿐이었다. 친구들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말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해봤자 "그러게 방황 좀 작작하지 그랬니!"라는 얘기가 나올 게 뻔하므로 ㅠ_ㅠ


 한 번도 틀렸다고 생각한 적 없는 나의 결정과 경험들이, 이런 상황으로 인해 남들에게 실패라는 생각을 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늘 잘 될 거라고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다녔으나, 사실 그 당시에는 내 마음속에 쭈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더랬다.. - _- 인생이여. 


 나의 마음은 정말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을 쳤다. 그럴 때마다 아주 솔직하게 내 느낌을 써서 보냈고, 그는 그런 나에게 늘 긍정적이고 힘이 돼주는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마음에 드는 회사에 면접을 보고, 쏙쏙 떨어지는 경험을 몇 번 하니 벌써 11월이 되었더랬다. 시간이 왜 이리 빠른지. 그때 선배 언니의 친척(선배 언니가 아니라, 친척이다. 그 친척은 모르는 사람이었음 -_-)이 일하고 있는 PR회사에서 봉투를 접는 인력이 필요한데, 혹시 알바를 하지 않겠냐며 놀고 있는 나에게 연락이 왔다.


 "한나야 가서 봉투 좀 접어라."

 "놀고 있는데, 봉투라도 접어야쥬. 가겠습니다."


 일주일간 봉투에 주소를 붙이는 등 그런 단순한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프로페셔널이 아니던가. 일 하나는 어딜 가든 기똥차게 잘했던 나다. 봉투를 접으면 어떤가. 한치의 쪼그라듦 없이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해 단순작업깔끔하게 끝냈다. 그렇게 일개 단순 노동자가 일하는 모습을 일주일간 지나다니며 보던 사장님이. 마지막 날 나를 슬며시 부르며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무얼 하다 온 처자인가요?"

 "저는 미국에서 1년 반, 싱가포르에서 1년 반 이런저런 일을 하다 올해 여름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근데 아직 직업을 못 구해서 놀고 있어요."


 그 얘기를 듣더니 이력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주부터 일을 시작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여 2009년 11월 말부터 생판 아무것도 모르는 PR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것도 나이 서른에 말이다.


 요즘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안 해본 일이 없는 것 같다. 해외무역, 호텔 예약실, 호텔 프런트 데스크, 헤드헌터, PR회사, 번역/통역, 그리고 지금은 1인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나중에 들려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지금 내가 소소하게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했던 모든 경험들의 집약체라고 할 수 다. 한 우물만 팠던 사람들은 쉽게 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아닐까.


 이런 다양한 경험이 1인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사실 아이를 낳고 다시 일을 구하려고 노력했던 30대 중후반에는, 한치의 도움도 되지 않았더랬다. 뿌리 없이 이일 저 일을 했기에, 뭐 하나 전문성도 없고, 나이는 많고, 잘하는 건 언어뿐이고..  그러니 일은 안 구해지고. 그때처럼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다.  


...  


 일을 구하니 일단 마음이 바로 안정이 되었다. 그리고 마음이 안정되니 독일에 계신 그분과 슬슬 연락을 끊어야겠다 싶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가 내년에 한국에서 1년간 체류할 수 있는 연구 프로젝트를 찾았다는 폭탄 메일을 보냈다..


 "안녕~ 나 내년 2월부터 그다음 해 2월까지 한국에서 살아볼까 하는데 갈까? 어떻게 생각하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너가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오지 마. 그리고 오더라도 나한테 그 어떤 것도 기대하면 안 되니까 잘 판단해. 잊지 마. 난 너의 여자 친구가 아니야."



-_-  


 아 진짜 한국에 오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진짜 오지는 않겠지.. 솔직히 약간 두려웠다. 정말 올까 봐. 그리고 나란 인간은 혹시라도 그가 오면 연민? 또는 동정심에 그를 잘 챙겨줄 거 같았기에 더더욱 ㅜㅜ


 "응 너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 그냥 내가 좋아서 가는 거야. 나 프로젝트 신청했어. 결과 나오면 얘기할게!"


 큰일이다 ㅜㅜ

 그때의 마음을 지금도  정확하게 모르겠. 나란 인간을 보기 위해 이 먼 나라까지 온다당황스러움과 저 냉혈한 독일인이랑 정말 잘되면 어쩌지 싶은 불안감.. 두려운 건지, 행복한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사실 아주 싫지도 않았다. 그리고 약간의 안도감도 들었던 거 같다.


 '그래 너가 나를 가볍게 또는 우습게 생각해서 사귄 건 아니었구나..' 싶은 내 존재성에 대한 안도감이랄까.  하나는 모태솔로로 살아온 내가 정말 한 남자에게는 극도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나에게 뭔지 모를 안심을 선사했다. 인간의 감정은 이렇게 오묘하다. 뭐 하나 정해진 것 없이 공기처럼 순환하고 흐르고 움직이니 말이다.


...


 과연 나는 로버트와 어찌 될까. 저 사람이 한국에 와서 1년을 살면 진짜 나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지? 등의 걱정과 불안감 그리고 약간의 희망(?)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의 늪으로 빠지려고 할 찰나였다.


 그가 두 번째 폭탄 메일을 보냈다.


 "약 10일 뒤에 너를 보러 2주간 한국에 갈 거야. 혜화역 근처에 있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뒀어. 한 번이라도 좋으니 꼭 만나자. 물론 연인이 아닌 친구로서. 근데 크리스마스 때는 꼭 널 만나고 싶어." 


.

.

.

.

.


 어?

 이 분 은근 모태솔로를 다룰 줄 아는데??


 모태솔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에게 올인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남자를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연애를 시작도 못하는 것이다... -_-


 근데 알고 보니

 로버트가 그런 비현실적인 남자였던 것.



To be continute-

매거진의 이전글 방랑 벽의 끝, 결혼 (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