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벽의 끝, 결혼 (25)
'한국에서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 시즌.'
나는 참 요상하다. 나의 시작은 누구보다 창대하나 그 끝은 평균보다 미약한 듯하다. 뭐든지 시작은 빠르게, 그리고 철저하게 한다. 그러나 끝은 흐지부지해지는 경향이 많다. 슬슬 방랑 벽의 끝자락이 보이려고 하니 이 무슨 청개구리 마음인지, 이거 왜 이리 마무리가 하기 싫지? ㅠㅠ 지금 바콜로드에서 노는 거 빼고는 하는 일도 없는데, 이때를 기회삼아 내 마음을 부여잡고 내년 1월까지 남은 4~5회를 다 끝내보려 한다.
...
'어머, 로버트가 2~3주 뒤면 한국에 온다고?' 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을 딱 감고 떴더니 벌써 그가 한국에 도착했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토요일 오전에 혜화역 근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김밥천국에서 슬렁슬렁 걸어 나오는 그를 보는데 왜 이리 짠한지...
2009년 12월은 오랜만에 온 역대급 한파로, 지속적으로 평균 최저 기온이 영하 10도를 찍는 날이 많았다. 근데 얇은 점퍼 하나 걸치고 삐쩍 말라 흐물흐물 걸어 나오는 그를 보자니.. 아이고, 저분 여기서 얼어 죽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과 안타까움이... ㅠ_ㅠ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추위에 그의 얼굴은 아주 창백했으며 동공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근처에서 샀을 작은 꽃다발을 들고 반가움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당황스러움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이게 한국의 추위야. 평창 동계 올림픽 때 스키 선수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라고 했던 거가 정말 농담이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나를 보러 온 그분이 하필. 이 잔인한 추위를 경험한 것. 그렇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것이다.
엄청나게 추운 날씨여도 우리는 개의치 않고 여기저기 잘 돌아다녔다. 잠실이랑 코엑스, 명동, 남산타워 등 서울의 관광지는 다 갔던 것 같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수원에 갔다. 그냥 그가 수원산성을 보고 싶다고 해서 나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수원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수원의 밤은 더 추웠다. 둘이 같이 있었지만 우리의 온기가 그 추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밖에서 걷기만 해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밤이었다. 여기저기 구경하며 우리가 머물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르게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내가 그에게 말했다.
"오늘 밤 같이 자자."
...
그때는 내가 그의 공식적인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우린 헤어졌고, 그냥 친구로 다시 만난 것이었으니까. 근데 그 맹추위에서도 즐거워하며 이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와 나를 보자니, 이 감정은 진짜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사람이랑 잠을 자도, 그리고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후회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그와 헤어질까 두려워 관계를 하지 않았는데, 그때는 헤어진다 한들 어떠냐. 이 마음이 진짜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근데 생각해보면 나란 인간, 참으로 고리타분하다ㅜㅜ 솔직히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내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아 가슴은 엄청 크고 말이지.. ;;
나의 한 마디에 그가 토끼눈이 되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자자고. 오늘 밤 같이 자자고."
"다시 한번 말해봐. 뭐라고??"
"지금 같이 자자고!!!"
-_-
그렇게 돌고 돌아 우리의 역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