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벽의 끝, 결혼 (27)
'위풍당당,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
2010년 2월 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가 한국에 돌아왔다. 솔직히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를 보기 위해 한국에서 1년간 산다는 게.. 물론 기쁘기는 했지만,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런 리스크를 감당해도 될까 싶은 걱정도 들었고, 음 이해하는 게 조금은 힘들었다... -_-
솔직히 나라면, 아니 대부분의 한국인이라면 이런 결정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 특히 한국 남자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피 튀기게 살아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 만큼, 가슴이 시키는 일을 무작정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한국은 딱딱하고, 경쟁적이며, 또 남의 이목을 중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너 곧 서른인데 어딜 가? 여자 만나려고? 다른 애들은 다 직장 잡고 저금한다. 결혼해야지. 조금만 더 늦으면 괜찮은 직장 못 구해. 남들이 시작할 때 시작해야지. 더 늦어지면 결혼도 못해.. 애도 낳아야지.'
안 봐도 비디오다. 오지랖의 사회, 무슨 말을 하던지 미래 걱정부터 해서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대한민국이 아닌가. 또한 사람들 이목이 무서워서 시도 조차 할 수 없는 유교사회. 평범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까이는 딱딱한 사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나라, 내 조국이 참 좋은 부분도 많지만, 이리 어려운 부분도 많다 ㅠ_ㅠ
반면, 독일은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나라이다. 나치 시절 때 모두가 생각 없이 히틀러를 추종했던 역사가 독일인들의 잠재의식 속에 트라우마를 남겼다고 한다. 하여 한 사람, 또는 주류 의견을 추종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지금은 일의 진척이 너무 어려울 정도로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사회가 됐다고 한다.
독일인 10명이 모여서 뭔가 일을 하려고 하면 한국인은 환장한다. 그들 중 2명은 이쪽, 3명은 저쪽, 5명은 여기서 하자고 한다고 치자. 대충 5명이 원하는 곳으로 가면 좋을 텐데, 여기를 좋아하지 않는 5명을 설득하고 또 설득한다... 그래도 그들이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또 디스커션 디스커션. 이러니 일이 진척이 될 리가 있나. 나는 저렇게는 몬산다.
-_-
또한 독일은 사회보장제도가 세계적으로 Top인 나라이다. 하여 여자를 보기 위해 낯선 땅에 와서 살다가 설사 실패하여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라에서 매월 1000유로 이상은 나오기 때문에 배고픔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 돈을 받으면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한마디로 치열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겠다.
...
로버트는 처음 3개월은 한국어를 배우겠다며 서울대 어학당을 다녔다. 그런데 웬일인가. 로버트 같은 인간이 그곳에 2명이나 더 있네.. -_- 터키에서 온 남자, 호주에서 온 남자. 한국인 여자친구를 잡기 위해 고국에서 잘 다니던 직장까지 포기하고 이곳까지 온 바보들이 2명이나 더 있다뉘... -_- 허허허
그가 온 후, 첫 한 달은 약간의 거리를 두며 만남을 가졌더랬다. 자주 만나길 원하는 그였지만, 신림동과 내가 사는 곳이 너무 멀었고, 직장인이라 시간이 많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너무 자주 보면 기대치가 높아져 싱가포르에서 만났을 때처럼 나한테 많은 것을 요구할까 싶은 두려움도 살짝 있었다. 이제는 너를 오버해서 만나 내 이가 흔들리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을 테다.라는 나의 의지였달까. -_-
그 한 달이 많이 외로웠을 거라 생각한다.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일부러 살피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그가 나를 지긋이 그리고 아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너만 기다리면서 낯선 이 나라에서 계속 혼자 있어야 된다면.. 나는 아마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갈 거 같아.."
그 말을 듣는데 뭔가 가슴에 쿵 떨어지는 느낌. 그 눈빛이 너무 솔직했고, 또 진실됐기에.. ㅠ_ㅠ 미안한 건 또 바로 사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자리에서 울면서,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너를 외롭게 해서 미안하다, 앞으로는 더 노력하겠다.' 등등 나 또한 진실되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그를 만나러 감.
인간관계의 핵심 키는 바로 유연함이 아니던가. 잘못했다고 느끼면 사과 하나는 정말 잘하는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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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한 달 정도 지나자, 로버트도 어학당 친구들과 친해지며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들과 어울리며 2010년을 진심으로 유쾌하게 보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참으로 자유롭고, 순수했고, 즐거웠던 시간. 한국어가 일취월장하는 그들을 보면서 느끼는 보람까지 있었더랬다.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은 브라질에서 온 교포男, 그 친구의 베스트라 얼떨결에 같이 오게 된 브라질男, 한국인이랑 결혼한 필리핀女, 태권도 유단자라 한국을 알고 싶어 온 독일女, 한국 여친 때문에 무작정 따라온 터키男 & 호주男 그리고 한국을 사랑하던 대만女까지.
로버트와 한국에서 연애하는 대부분의 순간에 저들이 함께 했기에, 앞으로도 저들의 이야기는 자주 나올 것이다. 모두들 내 추억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연들이다. 그렇지만 지금 따로 연락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이 나에게 소중한 인연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곳에서 만나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이런 인연이 우리의 삶을 더 향기롭고 더 오색찬란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
3개월이 지난 후, 로버트는 신림동에서 나와 한양대 근처에 원룸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원룸을 보는데, 왜 이리 비싸고 또 방은 어찌나 작은지... 둘 다 너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겨우겨우 구해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아니 보증금 500만 원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_-?
아무리 사회보장이 잘 되는 나라에서 왔다고 해도, 어찌 나이 20대 후반에 500만 원도 없이 살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 500만 원은 내 통장에서 빠져나왔고, 그가 매달 나한테 50만 원씩 갚는 걸로 마무리. 또한 그 덕분에 우리가 결혼할 때 그가 '500만 원은' 모을 수 있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오늘의 결론이다. -_-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