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쓰는 독일 귀신은 한국으로.
'돈 아끼는 한국 귀신의 알뜰한 생활이 시작됐다.'
돈 쓰는 독일 귀신인 남편은 2월 초에 한국으로 갔다. 넉넉하게 페소를 환전해서 가져왔는데 4주간 막 쓰고, 한 달이나 더 남은 우리에게 110만 원만 남기고 돌아간 그분이다. 물론 환전한 돈은 과외비, 월세, 전기세 등을 제외하고, 그저 생활비로 가져온 돈이다. 과외비나 월세 등의 목돈은 송금으로 해결하고 있다.
내 이전 글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독일은 사회보장제도가 너무 잘 되어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일인은 저금을 하지 않는다. 대신 버는 돈의 45프로를 세금으로 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저금하듯 보험에 많은 돈을 넣은 후, 남은 돈은 계획적으로 쓰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하게 쓰는 것 같다. 적어도 남편은 그렇다.
반면 나란 인간은 어떤가. 절약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그저 저금하는 돈만이 내 돈이라고 생각하는 아주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신용카드를 쓰면 얼마를 쓰는지 감이 오지 않기에, 평생을 체크카드만 쓰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또 38개국을 돌아다니면서도 카드를 쓰면 예상 지출 비용을 가늠할 수 없기에 오로지 현금을 들고 가, 현금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하며 늘 계획 있게 쓰는 녀자이기도 하다.
그렇다. 남편에게 나란 인간은 정말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는 아주 피곤한 종족인 것. -_-
그는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아이들이 집에서 영어 수업을 받을 때, 늘 홀로 근처 커피숍으로 가서 일을 했다. 일하는 건 사실 핑계고, 혼자 주 2회씩 마사지도 받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즐긴 것이다.
즐기는 건 좋다 이거다. 근데 돈 쓰는 독일 귀신이 말이지, 아내는 알뜰살뜰하게 장보고 음식 하며 살고 있는데, 2~3일에 한 번씩 돈봉투에서 3000페소씩 가져가서 쓰고 오는 게 문제 아니겠는가. 필리핀은 여전히 현금만 쓸 수 있는 곳이 많기에 카드로 긁을 수 있는 건 긁고도 저리 현금을 써대니... -_-
그래.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최대한 이해해 보고자 했다. 근데 하루는 평생 살면서 단 한 번도 사 본 적 없는 스케쳐스 운동화를 사서 들어오고... 또 뜬금없이 같이 안경점 가자고 하더니, 아니 갑자기 구찌, 레이밴, 톰포드 등 60만 원 넘는 안경을 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_-
"저기요.. 좋은 안경 사는 거 찬성해. 근데 이걸 굳이 필리핀에서 사겠다고? 진짜?? 정말로?"라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는 반드시 바콜로드에서 마음에 드는 안경을 사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꽂힌 것이다. 꽂히면 누구나가 그러하듯. 무조건 실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왕 살 거 모든 안경점을 다 가보고 사자. 여기서 몇 개만 보고 사는 것은 아니 된다라고 읍소를 한 후, 몰 내에 위치한 모든 안경점의 투어가 시작됐다.
이왕 사는 거 최고로 잘 어울리는 것으로 사야지. 하며 나도 열심히 봐줬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안경점이 은근 잘 어울리고, 일단 가격이 단 125000원이야. 60만 원짜리 보다가 10만 원 대 보니까 너무 싸!!! 거의 공짜 같은 느낌이야. 이거다 싶어 너무 잘 어울린다 물개 박수를 치며 최고다 최고다 폭풍 칭찬을 하니, 마음에 들었는지 125000원짜리 안경으로 퉁쳤다는 행복한 결말이다.
이런 내 인생을 보고 이웃사촌이 물었다.
"언니는 맨날 아끼고, 남편은 맨날 쓰는데 안 억울해? 나라면 억울해서 못살아."
- _-
근데 참 웃기지.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포인트가 다른 거 같다. 나는 돈을 쓰는 것보다 아끼는 데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물건을 사는 것보다 소비를 안 하고 아끼는 것을 좋아하고, 또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여행하는 데 쓸 때 인생의 참된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
때문에 그가 돈을 쓰면 그저 아까울 뿐이지, "내가 너처럼 펑펑 쓰면서 복수하겠다!"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아이고 저 화상 펑펑 쓰는 것 좀 봐... 내가 더 아껴야겠네!!'라는 보릿고개 시절에나 볼 법한 성향을 가진 것이다ㅜㅜ 가끔은 구질구질한 이런 내가 싫을 때도 있지만,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한국에 돌아가기 딱 이틀이 남은 그가 또 돈을 요구했다. -_- 이틀이니까 1000페소만 주자, 버럭 하며 일단 쓰고 남은 돈은 주고 갈 테니까 넉넉하게 3000페소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어차피 공항에서는 카드를 쓰면 되니까 "알았어~"하고 믿고 줬다.
공항 가는 날 1000 페소가 남았었는데, 그가 과연 주고 갔을까? 물론 아니지 -_- 남은 1000 페소로 공항에 있는 Spa Nature에서 마사지를 받아야 한다며 바콜로드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주 알차게 즐기다 간 것이다.
...
그가 가고 하루는 불안했다. 둥이를 나 혼자 봐야 하기에.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 맡기러 갔다가 빨래 가져오는 거랑, 매일 수영장 가서 애들이랑 놀아주는 거, 장보기, 택시 타고 테니스장 가기, 탁구 수업 데려가기, 주말에 놀기 등등 전부 다 혼자서 해야 하니까 말이다 -_-
근데 이건 무슨 일인가. 아빠가 없어서 집이 텅 빈 것 같다고 하는 둥이에게 아주 여유롭게 먹고 싶은 것도 다 사주고, 오락실에서 원하는 만큼 오락도 시켜주고, 저녁마다 나가서 사 먹고 했는데... 왜 이리 돈이 넉넉하게 남는 것이냐 -_- 도대체 남편은 지난 한 달 동안 어디다 쓴 줄도 모르게 그렇게나 현금을 쓰고 다닌 것이냔 말이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인 것 같다.
그가 간 후 셋이서 즐거운 12일을 보냈다. 남편이 서운할 정도로 보람차게 그리고 꽉 찬 스케줄로 말이다. 그러다 이번 주 화요일에 내 베프 M양이가 그녀의 아들과 함께 바콜로드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알뜰살뜰하게 좀 부탁해. 한나Kim 너만 믿고 간다"라는 특명과 함께.
소비의 여왕 M양이가 온다기에 그녀가 있는 동안 나도 좀 펑펑 써야지 싶었다. 근데 저런 부탁을 받은 것이다!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그녀를 보아왔지만 이런 특명은 처음이다. 이에 무한한 책임을 느낀 내가 답했다.
"소비의 여왕 M양아. 너 나한테 이런 부탁한 거 후회하게 될 텐데. 괜찮겠어? 나중에 나한테 작작 좀 하라고 할 거 같은데??"
"나 진심이야. 요즘 현금이 마른다. 최대한 가성비 있고, 알뜰살뜰하게 부탁해."
"좋아. 그럼 평일은 다 해 먹고, 주말에는 맛집 외식에 바콜로드 핵심 여행 전부 시켜줄게. 17박 18일 생활비 + 1대1 탁구 주3회, 1대1 테니스 주1회 레슨비 포함해서 60만원에 끊어보겠다. 나만 믿고 오시오."
나의 즐길 거 다 즐기고도 저렴하게 한 달 살기 하는 법을 다음 회에서 공개하겠다. 솔직히 나처럼 살면 해외여행 한 달 살기하면서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절약이 미덕이라 여기는, 또한 약간 부족한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는 철학을 가진 나만의 노하우를 기대하시길. -_-
오늘의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