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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의 확장

에세이#5

by 핸내


‘대나무’라는 글감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이 있다. 곡성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토마토를 심기 위해 대나무로 지주대 세우는 법을 배웠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던 내가, 하물며 몸 쓰는 일도 낯설던 내가 낑낑거리며 톱질하던 때가 떠오른다. 대나무 숲으로 올라가 적당한 두께의 대나무를 골라 자른다. 아무도 오르지 않는 숲, 댓잎 사이로 스며드는 볕이 신비로워 보인다. 찰랑이는 잎과 새소리, 서걱서걱 톱질하는 소리. 쩌억- 내 키를 훌쩍 뛰어넘는 대나무가 쓰러진다. 댓잎을 질질 끌며 밭으로 간다. 대나무 방망이로 내리쳐 가지를 제거한 후, 땅에 박는다. 마끈을 사용해 대나무끼리 묶어준다. 여러 기둥의 대나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서 있다.

해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창세기 구절이 절로 생각난다. 뭉툭한 쇠로 박아 둔 밭을 지나, 내 밭에 서 있는 대나무 지주대. 자태가 아름답다. 사심 담긴 평가다. 혼자 하는 게 익숙지 않던 내가 혼자 만들어낸 첫 구조물이어서 그런지, 애정이 저절로 생긴다. 뒷산에서 마구 자라는 대나무를 쓱싹 잘라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내는 상상을 한다.

푸바오의 최애 음식, 도라에몽 대나무 헬리콥터로 그려지던 대나무는 이제 농사의 재료가 된다. 쓰임의 확장, 새롭게 보이는 것들. 시골에 와서 대나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뿌리로 번식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각각의 대나무처럼 보여도 뿌리가 하나일 수 있다는 사실. 매년 쑥쑥 번져서 집 뒤에 대나무밭이 있다면 순식간에 집을 덮칠 수도 있다는 사실. 하지만 그 덕에 매년 여름이 오기 전 죽순을 양껏 먹을 수 있다.

시골에 오고서 그냥 지나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죽순이 어디서부터 온 건지 직접 보고 만지고 먹는다. 내 손에서부터 비롯된 식재료. 내 손에서 만들어지는 지주대. 잡초라 뭉뚱그려 부르던 풀들에 구체적인 모양과 이름이 생긴다. 봄까치꽃, 광대나물, 머위, 쑥부쟁이, 개망초. 가지각색의 맛을 경험한다. 하나의 사물, 자연물의 여러 쓰임을 발견한다.

도시에선 소비자, 또는 3차 생산자로만 살았다. 모든 음식과 물건은 마트에서 얻어와야 했으며, 가내수공업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단추 다는 법을 몰라 혹은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사소한 바느질조차 돈으로 해결했다. 모든 것이 맡겨지고 외주화되는 사회 안에 존재했다. 근데 여기선 1차 생산자로서 먹을 것을 기르고 채집하고, 2차 생산자로서 무언가 만들어낸다. 대나무를 잘라 지주대를 세우듯, 콩을 길러 두유를 만들고, 보리수를 따다 청을 담근다. 메주를 띄워다 장을 담근다.

나의 쓰임도 달라졌다.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사회복지사’라는 타이틀로만 살던 내가, 여기선 농부가 되어 보기도 하고, 글 쓰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풍물패의 일원이기도 하며 누군가의 이웃이기도 하다. 도시에선 직장을 벗어나면 나의 쓸모가 흐릿했다. 그와 달리 시골에선 나의 빈자리가 큼지막하게 드러난다. 대체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사는 곳을 바꿔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곳, 나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곳. 그게 꼭 도시일 필요는 없다. 아직 나는 나를 더 알아가고 싶다. 시골에서 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장소를 찾아 나설 수 있을까?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지만, 나의 새로운 쓰임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곡성으로 이주한 것에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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