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진정한 장소를 덮으며
책장을 덮으며
[탐닉]이라는 소설로 아니 에르노를 만났다가 초반에 포기했던
내게 이 책을 발행한 1984books의 편집장님은
댓글로 아니 에르노의 문학을 이해하고 싶다면 [진정한 장소]부터 읽으라고 조언하셨다.
얼결에 [빈 옷장]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본의 아니게 [빈 옷장]으로 아니 에르노를 대면하게 되었다.
그 책을 마친 후 [진정한 장소]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덕분에 인터뷰집을 통한 막연한 예습 없이
실전(빈 옷장)에서 온 몸으로 부대끼며 아니 에르노를 경험한 후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으니까.
아무런 조력자 없이 홀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했던
빈 옷장의 어린 르쉬르가 안타까워 나는 많이 상처 받고 이입하며 괴로워했었는데,
의외로 [진정한 장소]에서 만난 아니 에르노는
덤덤하게 그 지난 시절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덤덤하게 내뱉는 고백 속에 허세도 과장도 연민도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나는 신뢰하게 된다.
(빈 옷장에서 받은 나의 충격과 상처도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 ㅎ)
[진정한 장소]는 다큐멘터리 감독 미셸 포르트와 아니 에르노가 함께한 인터뷰집이다.
그녀의 '진정한 장소'는 글쓰기와 문학이다.
그녀는 '무엇인가에 대해 쓰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p.19)라고 말한다.
그녀가 여러 번 건너온 사회적인 이동, 지금의 자신의 성취에 대해
특별한 애착과 보상처럼 말하지 않는 그녀의 마음이 왠지 모르게 이해가 되었다. (왤까...)
프라이버시가 없었던 부모님의 카페 겸 상점에서의 어린 시절,
부르주아 계층의 학우들 사이에서 겪게 되는 양쪽 세계와의 단절,
작가와 교수로서의 성장으로 또 한 번 건너온 세계,
꿈꾸던 것을 이루었으나 그것은 자신이 쫓아온 꿈이 아니었다는 그녀의 말을 듣다 보면
왜 글쓰기가 그녀에게 [진정한 장소]인지 이해하게 된다.
"인생에는 수많은 비밀들이 있고, 글쓰기는 그 주위를 맴돌아요."
아니 에르노가 16, 17세에 겪었던 커다란 고독과 고통의 이유 중에는
가족과의(책에서는 아버지와의) 문화적인 격차가 있었다.
'너는 우리보다 더 나을 거야'라는 마음과 그럼에도 그들이 알고 있던 아이 그대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부모보다 자식들이 더 교육받는 것에서 기인한 혼란과 아픔은
우리에게 [빈 옷장]이라는 놀라운 책을 남겨주었다.
'배우는 것과 그대로 남는 것의 이중적인 제약'이라고 한 마디로 정리해내기까지
그녀가 겪었을 많은 혼란과 고통, 외로움을 짐작하게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를 구성하는 내면의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을 모아야 해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아버지를 보며 받은 상처,
가족과의 지성의 격차와 사립학교 아이들과 자신 사이의 문화적 격차를 동시에 겪었던 시간,
그리고 낙태.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글쓰기의 재료가 된다.
나는 [진정한 장소]는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레퍼런스가 될 거라 생각한다.
그녀처럼 객관적 관찰자의 시점으로 자신의 내면의 고독과 충돌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듯이 기억을 남기고,
감정의 나열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에 가장 적절한 감정이 오도록 배치해가는 일렬의 방식들,
과장도 연민도 없이 날것 그대로 던지면서도 전혀 엉성하지 않은 표현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계속 궁금해져 다음 책이 이어진다.
북리뷰로 만들고 싶어서 전반적인 것들은 풀지 않았다.
그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와 질문이 많은 책이다.
울림이 큰 책들을 많이 만난 한 해이지만
아마도 이 책은 나의 올해의 책이 될 것 같다.
무엇을 써야 하는지, 왜 써야 하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리고 단단한 세계관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구체적으로 말해봐..라는 생각이 든다면?
우선 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과 진정한 장소를 읽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