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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옷장, 진정한 장소 그리고 아니에르노

지금 우리 여기서, 해나의 책장 2

by 해나책장


"매끄럽지도 유려하지도 찰랑거리지도 않는 그녀의 기억은

거칠게 튀어 올라와 때로는 흐름을 방해하고,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덜커덩거리는 지점을 두고,

<<그것은 허구 없는 나의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작가 앞에서,

우리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우리 역시 삶의 울퉁불퉁한 결을 지나왔고,

또 지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삶의 결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신이 매끄럽고 찰랑거리기만 한 길을 지나왔다면

아니 에르노의 책을 펼쳤을 리 없지 않은가...."

(빈옷장 | 옮기인의 말/ 신유진) p.219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 삶의 결이 보드랍고 찰랑거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칼같이 찌른다', '날것의 언어다 '라는 표현을 듣는 그녀의 언어는

문학적으로 층이 깊고 독특한 시선과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들여다볼수록 계속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나에게 아니 에르노는

치열하게 자신의 굴곡진 고독을 통과해온 사람,

그 도구로 문학과 글쓰기를 선택한 작가,

자신의 세계의 질서를 오롯이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 간 강인함 여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aAtOv-sSOY






아니 에르노는 누구인가?



아니 에르노는 1940년 릴본에서 태어난 현존하는 프랑스 작가이다.

루앙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정식 교원, 현대문학 교수 자격증을 취득하고 1974년 '빈 옷장'으로 등단해 '남자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수상한다.

아니 에르노 문학은 자전적인 글쓰기와 역사, 사회를 향한 작가만의 시선을

가공이나 은유 없이 정확하게 담아낸다.

자전적 체험을 글로 옮긴다는 것과 작가만의 고유한 시선을

날것의 언어로 담아내는 방식은 독특한 그녀만의 개성을 만든다.


올해 아니 에르노에게 주목하게 된 이유도 이 낯선 시선 때문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표현들이 굉장히 날것처럼 느껴지고 낯설어서

나의 틀 바깥세상을 마주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살아온 문화와 세계관을 발견해가는 과정이 틀에 박힌 저의 세계를 확장시켜주는 요소들이 있어서 그녀의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었다.


대표작으로는 '단순한 열정', '사진의 용도', '한 여자', '부끄러움', '또 다른 소녀'등이 있으며

2008년 '세월'로 마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한다.


[진정한 장소]와 [빈 옷장]은 그녀의 문학 세계가 형성되어간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진정한 장소는 다큐멘터리 감독 미셸 포르트와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집이며

빈 옷장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한 처녀작이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 소설 빈 옷장




나이 든 여자의 주방에서 스무 살의 소녀가 불법 낙태 수술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이 플래시백 장치로 사용되어 수술받는 소녀의 가난했던 과거로 내달린다.

화자는 자기가 태어난 가난한 세계와 학업을 통해 도달한 세상에 큰 격차를 느낀다.

노동자로 태어나 평생을 사신 부모님의 세계, 존재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조차 다른 부르주아의 세계.

그 두 세계의 충돌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얼마나 강렬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서술하다

다시 낙태 시술대 위에서 소설의 서사는 마무리된다.


"내가 감탄했던 것들을 떠올리는 것이 역겹다 할지라도.

세상은 그곳에 있었다." (빈 옷장) p.51


가난한 동네 릴본.

이곳에서 그의 부모님은 르쉬르 상점을 운영한다.

이곳은 하층민의 저급하고 가난한 문화가 스며있는 곳이고

그녀의 집은 카페 2층이지요. 그래서 프라이버시가 없는 곳이다.

가난하고 날 것 그대로의 문화와 이웃들 그리고 세련되지도 지적이지도 않은 부모님.

아버지는 문화에 무지하고, 어머니는 성적인 금기가 강한 인물이다.

그녀는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부르주아 계층의 아이들이 다니는 사립학교로 가게 된다.

이곳에서 드니즈는 학우들과 자신의 격차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배경과 학우들이 자라온 문화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혼란스러워한다.


이를 통해 인생에서 최초의 #분리 와 #단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빈 옷장]에서 이 장면이 화자의 묘사를 통해 굉장히 자세하게 그려진다.

심리학적으로 아이가 불안할 때 보이는 성적 행동들이 많이 묘사된다.

단절, 분리되어 자신의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치열하고 고독한지

그리고 그 단절감이 아이의 내면에 얼마나 폭력처럼 영향하는지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느 날 선생님은 폭발했다.

<<학생의 어머니는 어떻게 점심에 방을 정리할 수 있죠? 매일?>>

<<날마다 달라요. 어떤 때는 오후에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지 않아요. 시간이 없으시거든요.>>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본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요?

내가 학생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 거라고 생각해요?>>

옆에 있던 여자아이가 알려 준다.

침대는 아침에, 게다가 매일 정리해야 하는 거라고.

<<정말 특이한 집에 사는 모양이구나!>>

다른 여자애들은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웃음, 행복, 갑자기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 알겠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데.

왜 나는 저 아이들과 달라야 하는가,

배에 단단한 돌덩이가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눈물 때문에 눈이 따갑다.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다.

이것은 모욕이다.

학교에서 나는 모욕을 배웠고, 모욕을 느꼈다." (빈 옷장) p.65/66



그녀는 자신이 자라온 문화를 부끄러워했다가, 감추려 했다가 학교에서 인정받기 위해 성적을 올리기도 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렇게 화자는 양쪽 세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이런 상황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조언해 줄 수 있는 어른이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주인공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좋은 멘토도 없었고, 비슷한 상황을 먼저 겪어서

나아가는 길을 알고 있는 언니나 선배도 없다.

그래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찾아가는 과정은

굉장히 불안정하고 치열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져서 읽다 보면 마음이 굉장히 아프고 힘들어진다.



"나의 우월함과 복수를 지키기 위해

나는 점점 더 학교의 가벼운 놀이에 스며들었다.

나는 두 세상을 오갔고, 아무 생각 없이 그 둘 사이를 통과했다.

실수하지 않으면, 욕설이나 방구석의 회녹색 장과

냄비 바닥에 붙어서 긁어내야 하는 카슐레와 관련된 유성의 표현들이

내 입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면 그만이었다.

학교에서는 배우는 것들이 진짜이고 중요한 것처럼 행동해야 했으며,

선생님이 '품', '레미와 콜레트' 같은 웃긴 이야기를 들려주면 웃어야 했고,

여자아이들의 장난에 사실 아무렇지도 않지만

질색하는 척하며 비명을 질러야 했다.

남들과 다르지 않기. 모두를 속이기 위해서.

몇 년 동안 적절한 균형을 이뤘다.

6학년 때까지는 이중 생활을 했다. 불편함 없이...

그 두 세계는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나란히 있었다. (빈 옷장) p.82



이 책의 첫 장면이 불법 낙태 시술 현장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이 시절의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아이가 받은 폭력성과 모욕감이

여전히 흔적을 남겨서 스스로를 벌주려고 하는 마음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사립학교를 다니고, 부르주아 자녀와 연애를 하고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형성되고 쌓여온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넘어설 수 없는 어떤 벽을 계속 느낀다.


주인공 드니즈 르쉬르는 성장기까지 계속해서 아무도 공감해 주거나 이해해 줄 수 없는 고독감을

혼자 견뎌내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녀에게 독서와 글쓰기는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창조해 가는 도피처가 된다.



"나를 매료시키는 그 단어들을 붙잡아 내게 두고, 내 글 속에 넣고 싶다.

나는 그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사실상 그 일은 책이 말하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작문을 통해 프랑스 전국을 여행하는 드니즈 르쉬르

-나는 루아과 아브르보다 더 먼 곳을 가본 적이 없었다-를 창조했고,

그 드니즈 르쉬르는 오건디 드레스를 입고

풀솜 실로 된 장갑을 끼고 부드러운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단어들을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여자애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세계보다 더 아름답고 더 순수하고

더 풍부한 세계에서 살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다.

모든 것이 단어로 되어 있다.

나는 책 속의 단어들을 좋아하며 모든 단어를 공부한다." (빈 옷장) p.87




"책은 나를 조금도 비난하지 않는다.

투명하고 분명한 나의 여주인공들의 인생은

나를 냄새나는 상점의 누가 도둑으로, 거울 앞에서 들쳐 올린 치마로,

술 취한 노인들에게 던지는 조소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책은 모든 것이 잠잠했을 때 내 머릿속에 살던,

내가 원하는 모습 그대로 드니즈 르쉬르의 희미한 윤곽을 그린다." p.91


아니 에르노는 교수가 된 후 출신이 같은 직업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교육하다

이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문화 밖에 사는 아이들에게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을

어떻게 전달하며 좋아하게 만들까?'

'내가 가르치는 것이 그들 안에서 무엇이 될까?'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의 한계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볼 텐데..'



"<<각자 타고난 운이 있는 거지>>라고 어느 정도 가볍게 말하는 것과,

그것을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달라요.

왜 이런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게 되죠.

이 모든 것들은 글로 쓰기에 너무 무겁고 어려웠어요.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다가 1970년대 초에 그것이 제가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이 되죠.

빈 옷장은 본질적인 것, 분명 영원히 저를 결정지었던 것으로의 회귀예요.

그것이 세상을 보는 저의 시각을 결정지었고,

그러니까 글 속에서의 제 시선을 결정지었죠.

제가 태어난 세상은 제가 학업을 통해서 도달한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요.

저는 에토스(민족적, 사회적 관습을 뜻함)와 존재의 방식,

생각하는 방식조차 달랐던 세계를 지나왔죠.

그 충격은 여전히 제 안에, 육체적으로도 남아 있어요.

어떤 상황들은.... 아니, 쑥스러움이나 불편함이 아니라,

자리, 마치 저의 진짜 자리가 아닌 것 같이,

진짜 그곳에 있지 않으면서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대부분의 사교적인 상황들이 그렇죠.

저의 최초의 세계, 지배받는 세계를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 자체로 부정하는 세계, 지배당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를 마주해야 하는 상황들이요." (진정한 장소) p.71



아니 에르노는 여러 번의 사회적 계층 이동을 겪게 되며

각각의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 사이에서 느꼈던 충격을

빈 옷장이라는 소설로 녹여낸다.

그 마음속에는 고독, 미움, 원망, 자기 부인, 자기 확신,

자기 연민, 자기혐오 등 다양한 감정의 층이 담겨있다.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이렇게 칼끝 같은 언어로 잘 쓸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 섬세하고 어린 여자애가 그 혼란스러운 감정을 처리하며 혼자 고군분투하고

성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연애하다 혼자 남고,

아이를 낙태하고 그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외롭고 혼란스러웠을까를 생각하며 굉장히 휘몰아치는 감정으로

이 책을 읽었다.





진정한 장소(아니 에르노) | 1984 Books



진정한 장소는 다큐멘터리 감독 미셸 포르트와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집이다.

이 책을 통해 아니 에르노의 삶의 히스토리와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녀에게 글쓰기가 가진 의미,

그리고 체험적인 글쓰기를 문학의 소재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10개의 챕터로 나누어지는데

작가의 어린 시절, 어머니, 아버지, 글쓰기, 체험, 정치적 목적을 지닌 여성으로서의 문학 등

아니 에르노를 형성하는 문학 세계의 근간이 된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다룬다.

아니 에르노의 문학을 이해하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으시면 많이 도움이 될듯하다.

나는 [빈 옷장]을 먼저 읽었기 때문에 아무 정보 없이 소설을 보고 충격을 받고 그 후에 이 책을 읽으며

아니 에르노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빈 옷장을 읽을 땐 작가가 굉장히 시니컬하고 슬픈 사람일 줄 알았는데

진정한 장소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자신의 세계가 잘 서 있고

정치적 목소리와 문학적 목소리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빈 옷장]이 어린 화자의 목소리로 기록되었다면

[진정한 장소]는 작가로서 성숙한 아니 에르노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기 때문인듯하다.


[진정한 장소]에서는 그녀의 삶의 역사와 함께

글쓰기와 문학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다.

진정한 장소는 개인적으로 '올해의 책'이기도 하다.

[빈 옷장]이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충돌이 가지는 폭력성을

이렇게 잘 쓴 글로 심도 있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감흥을 받은 상태라

[진정한 장소]에서 아니 에르노의 세계관과 개성이 선명하게 다가와서

저에겐 굉장히 큰 경험이었다.


그녀의 '진정한 장소'는 글쓰기와 문학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이 분리와 단절의 경험 속에서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글쓰기는 <<진정한 나만의 장소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내가 자리한 모든 장소들 중에서 유일하게 비물질적인 장소이며,

어느 곳이라고 지정할 수 없지만,

나는 어쨌든 그곳에 그 모든 장소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진정한 장소) p.10


그녀는 자전적인 체험들을 글쓰기의 소재로 사용한다.

12살에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아버지,

책을 신성시하고 성적인 금기가 강했던 어머니,

자신이 살았던 세계와 학업을 통해 건너간 부르주아 세계의

사회적, 문화적 격차의 충돌, 낙태 경험 등이 모두 글쓰기의 재료가 된다.


릴본의 옛 상점에 있던 부모님의 카페에서의 저급하고 가난한 문화,

노동자의 삶을 살아온 부모님의 양가적인 마음,

이를테면 '너는 우리보다 더 나을 거야' 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그들이 알던 아이 그대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 등을

모두 들여다보고 마음에 담아놓는다.

이것을 '배우는 것과 그대로 남는 것의 이중적인 제약'이라고 덤덤하게 표현하는데

어렵게 한 마디로 정리하기까지 그녀가 겪었을 많은 혼란과 고통, 외로움을 짐작하게 된다.

그녀는 객관적 관찰자가 되어 고독과 충돌을 바라보며 칼로 찌르는 것처럼 날카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해간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문학의 소재로 사용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조심스럽고 독자에게 불편한 일일 수도 있다.

'당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정신분석과 어떻게 다르죠?'라는 질문에 그녀는 말한다.



"정신분석학과 가장 큰 차이는 털어놓는 말이 아니라 실질적인 작업,

하나의 대상을 구상하는 것이라는 점이죠.

7년 동안 정신 분석을 했을 때, 결국 당신은 무엇을 얻게 됐나요?(...)

그것은 오직 당신만의 일이에요.

그런데 책을 쓰면서 7년을 보내고 그것을 마친다면,

자신 외부의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거예요.

저에게는 제가 집을 지은 것과 같은 거죠.

자기 자신의 인생에서 그렇듯이, 누군가 들어갈 수 있는 집이요.

글은 때때로 가장 끔찍한 고통의 장소이지만 또 자유의 장소이기도 해요.

어떤 것들을 쓰거나 쓰지 않을 수 있으니까.

글쓰기에 가끔씩 정신분석학과 비슷할 수 있는 탐구 과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긴 하지만,

이 두 방식을 어떻게 헷갈릴 수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어요.

글쓰기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행위이죠.

글쓰기는 저에게 고해가 아니에요.

고해와는 전혀 상관없죠.

고해도 아니고, 회개도 아닌, 구상이며 구성이죠. (진정한 장소) p.104




그녀의 문학을 읽는 것으로 저는 한 시대를,

그리고 프랑스 사회의 문화의 한 단면을,

한 사람의 역사가 세상의 역사와 충돌할 때 일어나는 많은 서사를 이해하게 된다.

아니 에르노는 '글을 쓰는 것은 이름이나 사람으로서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니라

시선의 흔적을 남기는 거'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세상의 지배적인 시선에 반대하는 글을 쓴다.

경험을 통한 지식이 실질적인 지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 상처로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정제된 문학은 정제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났을 때 무력해진다.' (빈옷장) p.216



빈 옷장을 읽으며 한 마디도 정리할 수 없는 마음, 무력하고 아팠다.

경중은 다르고 문화와 상황은 다르겠지만 '나'의 세계와 또 다른 세계 사이에 단절을 느낄 때

우리는 벽에 부딪히고 또 자립해 간다.

저나 세상에 태어나면 그다음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그 치열함과 좌절, 폭력성을 다 통과하고

자신의 상처를 재료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이 작가에 대해

어떻게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그녀의 옷장 앞에 섰다.

컴컴한 그곳을 향해, 텍스트를 향해 손을 뻗기 위해,

숨겨 둔 '나'를 만나기 위해.

우리를 찌르는 그녀의 글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지만,

찔려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칼잡이의 칼은 사람을 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외과 의사의 칼이 그렇고 작가의 칼이 그렇다.

물론 그 두 칼이 가는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한쪽은 아픈 부위를 제거 혹은 덜어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 쪽은 아픈 곳을 깨워, 아픈 곳이 있었음을 혹은 있음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선명한 피가 흐르는 그곳을 가리키며 묻는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당신은 그 상처로 무엇을 하겠느냐고....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빈 옷장, 역자의 글 신유진) p.221



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을 읽으며 이 정제되지 않은 상처의 문학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상처와 분리의 경험을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처로 무엇을 할까?

이 책을 덮으며 나도 이 질문 앞에 홀로 서 있다.



해나의 한 줄 요약 :

이제부터 그 상처로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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