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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책 소개 | 좋아하고 존경하고 닮고 싶은 작가

feat.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by 해나책장


시간과 공간이란 주제로 글을 쓴다면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

나는 사람과 추억을 이야기할 것 같다.

존 버거는 시간과 공간을 주제로 글을 쓸 때

시골 마을의 저녁 시간 라일락 향기와 함께 떠올린 사랑의 마음 같은 개인적인 정서부터

1980년대 쿠데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비극,

도시화로 인한 이주자들의 삶의 극적인 변화까지 폭넓게 담아낸다.

깊고 아름다운 문장 속에서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짚어내는 그의 시선은

책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과 감동을 주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6-ytAmBIe9Y



이 책은 1984년에 초판 발행된 책이다.

한국어 버전으로는 2004년도에 열화당에서 출간되었다.

존 버거가 그간의 저서들에서 다루었던 여러 주제들을 포괄 함축해서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 존 버거 소개


존 버거 1.png




존 버거는 1926년 영국에서 태어난 작가이다.

미술평론가, 철학자, 화가, 시인, 소설가 등으로 활동했으며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징한 관점으로 많은 글을 남겼다.

중년 시절 영국을 떠나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들어가

삼십 년이 넘는 시간을 농사를 주업으로 살아간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책을 읽고 글을 써서 바깥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을 했다.

2017년에 타계하여 이제 새로운 저서를 만나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지만

그가 일생을 살아오며 남긴 아름다운 책들도 풍성해서

나 같은 존버거주의자들에겐 귀중한 유산처럼 남아 사랑받고 있다.

경험상 존버거주의자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신뢰와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굉장히 대중적인 작가가 아니어서 그런 듯.



| 책의 구성


이 책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큰 철학적 주제를 바탕으로

근대의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시간관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문명과 도시화에 의해 분리되고 소외된 인간 소외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존 버거의 사색을 엮어가는 중 주제와 관련된 그의 시들이 소개된다.

문장이 너무나 아름답고 깊은 사색을 느낄 수 있으며

그가 제시하는 날카로운 질문과 메시지를 통해 당연하고 무심한 듯 넘어갔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생각을 확장하고 사유해볼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존 버거를 읽는 이유는 사물과 사람, 문화와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를

깊이 있고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그의 시선 때문이다.

세상을 향해서는 거칠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지만,

개인의 역사와 세계관을 향해서는 따뜻한 시선을 가진 아름다운 작가.

그래서 나 같은 존버거주의자들에게 존 버거는

대체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단 한 명의 작가가 아닐까 싶다.


존 버거의 책을 읽다 보면 당연하고 무심하게 지나갔던 여러 부분들이

그의 시선 속에서 생명을 얻는 것처럼 느껴지고 감탄하게 된다.

그런 민감하고도 따뜻한 시선을 닮고 싶고 훈련하고 싶어서 나는 존 버거의 책들을

성실하게 읽어오고 있다.



이 책의 1부는 시간, 2부는 공간에 대해 다룬다.

존 버거가 말하는 시간 속에는 역사와 혁명에 대한 거대한 이야기부터

개인의 이야기까지 다채롭게 담겨있다.


존버거 2.png


언젠가 한때

어느 이야기의 한때

시의 한때

그림의 한때

삶의 한때

렌즈를 통해 본 한때

어린 시절의 한때

오손에서의 한때

지나간 어느 한때

노래의 한때

스코틀랜드 고지에서의 한때



1부는 이렇게 열한 개의 에세이로 구성된다.

목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일상의 조각들에서

의미를 부여하며 써 내려간 그의 풍부한 사유를 엿볼 수 있다.

각각의 챕터에서 존 버거의 빛나는 통찰과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이 책은 어느 여행자(혹은 이민자)가 플랫폼에서 지갑을 열며

사랑하는 이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존버거 3.png



'신분증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지불하려고,

혹은 열차 시간표를 확인하느라고

지갑을 열 때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본다.(...)

가슴속 지갑 안에

들어 있는 꽃 한 송이,

우리로 하여금 산맥보다

더 오래 살게 하는 힘.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p.11



가슴속 지갑 안에 들어 있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우리로 하여금 산맥보다 더 오래 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이 책의 많은 문장들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아끼는 문장이다.



"밀도를 가지는 깊은 경험은 우리의 시간을 의미 있게 보존한다"


이 책의 1부는 시간에 관한 글이다.

존 버거가 말하는 시간에는 '육체의 시간'과 '의식의 시간'이 있다.

육체의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이고, 의식의 시간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이다.

이 후자의 시간은 시대에 따라 달리 이해되어 왔다.

그래서 의식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는 것,

과거가 미래에 대해 가지는 관계성을 제시하는 것이야 말로 문명이 가진 첫 번째 과제라고 존 버거는 말한다.

그는 어느 한순간을 깊이 경험할수록 경험은 더 많이 축적된다고.

그런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경우 시간이 낭비된다고 말하긴 힘들다.

그래서 그는 '살아 있는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와 밀도의 문제'라고 말한다.

너무 공감되었다.


그는 '열역학 법칙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지만 그 괄호의 앞과 뒤에 무엇이 오는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것은 죽음과 소멸을 향해 가는 거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남긴다.

자녀를 통해 다음 세대를 만들고 우리의 유전적 장치들은 소멸되지 않고 연결된다.

존은 이 책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다음 세대를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나올 때마다 반가워했다. 존의 책이 한 권 한 권 쉽진 않았기 때문에 ㅋㅋ)

그 영원성을 이어가는 매개체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가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굉장히 낭만적이고 숭고하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은 소멸되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선택을 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소멸되는 시간에 저항한다.



"사랑은 존재의 중심을 재건한다"



2부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 중에도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꼭지가 있다.

라일락 꽃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것도 내가 참 좋아하는 꼭지이다.

특별한 서사가 있는 부분은 아닌데 장면 묘사가 빼어난 에피소드이다.

화자의 연인은 라일락의 향기와 젖소를 키우는 외양간 냄새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화자는 둘 모두 평화와 느림의 냄새라고 이야기한다.

화자는 석양이 지는 무렵 부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창턱에는 친구 집 정원에서 꺾어 온 라일락 꽃이 병에 담겨 있다.

그리고 창밖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잠시 전 눈을 들어 보니, 어두워지는 빛 속의 라일락 가지가

황혼 속에 서 있는 먼 언덕의 꽃나무들처럼 보였다.

그것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여기 집들은 벽이 두텁다. 겨울이 춥기 때문이다.

창 곁에 면도용 거울이 하나 달려 있다.

거울에 비친 라일락 가지 하나를 올려다본다.

작은 꽃에는 더 작은 꽃잎들이 달려 있다.

너무 또렷하고 생생하고 또 너무 가깝게들 붙어 있어,

흡사 피부에 자리한 모공들처럼 보인다.

왜 그 가지만이, 실제로는 내게 더 가까이 있는 다른 가지들보다

더 또렷하게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이윽고 내게서 먼 쪽에 있는 거울 속의 그 가지가

저물어 가는 햇빛을 가득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저녁이 올 때마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거울 속의 저 라일락 가지처럼 자리한다.' p.70




존버거 4.png



마지막 문장 '저녁이 올 때마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거울 속의 저 라일락 가지처럼 자리한다'하는 부분을 읽을 때

진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을 만큼 좋았다. 너무 예쁜 흐름이지 않은가!

라일락 향기가 맴도는 평화로운 저녁 시간에

라일락 가지에 내려앉은 햇빛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이렇게 뭉클하게 표현하다니.



"기록은 시간의 증언이다"



존 버거는 도시화, 이민, 쿠데타와 혁명 같은 시대적 흐름을 제시하면서도

이런 단어들을 역사적 분류의 카테고리 속에 넣지 않는다.

현미경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개인과 개인의 서사 속으로 들어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가 가지는 고유의 시간과 의미로 마주할 때

우리는 문명과 도시화로 인한 인간 소외 같은 문제들을 그냥 덤덤하게만 볼 수 없다.

존 버거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각각의 개인의 서사가 가진 다양성에 대해

좀 더 넓은 시선으로 가까이 체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문체는 덤덤하고 날카로워서 좀 더 정신을 차리고

진지하고 엄숙하게 사회 문제들과 개인의 서사를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책 속에 한 장의 사진이 등장한다.

그런데 책의 지면에는 사진이 인쇄되지 않고 비워져 있다.


1980년 9월 12일에 터키 케난 에브렌 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이 된다.

그는 이후 반대파를 탄압하고 고문을 자행하는 등

군사정치를 합리화시키는 독재정치를 일삼는다.

그 일에 대한 존 버거의 시선이 담겨있는 부분이다.

이 일로 적어도 오만 명이 체포되었고 많은 이들이 고문을 당한다.

자신이 가진 사진으로 인물들이 위험에 노출될까 봐

책의 지면에 사진을 인쇄하지 않고 네모만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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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의 사람들이 소식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 최소 팔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다섯 사람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은

아마 이 시간 고문당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 어머니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을 그의 몸은,

상상도 못 할 고통을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이다." p.25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장면이 바뀌며 천사 석상이 등장한다.

석상의 토대석에는 제 일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마흔 다섯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토대석의 반대편에는 제 이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석상을 바라보며 존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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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비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품고서라도 해방된 자기 나라의 마을을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걸어 보는 미래의 어느 아침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 천사 석상은 그런 아침을 상징한다." p.27



수많은 시간들이 역사 속에 흘러가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의 진심과 용기는

시간 속에 의미를 가지고 기억된다.

그래서 결과와 상관없이 그렇게 치열하게 나아온 시간은

기억할 의미가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 버거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역사적 흐름의 증인으로

그가 계속해서 기록해 놓은 이야기들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비극 속에 어떤 이들은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고,

어떤 투쟁은 실패하고 그냥 흘러가고 무너지는 것 같아도

누군가는 기억하고 남기고 있는 거니까. (그런 생각할 때마다 묘한 위안이 있다)



| 존 버거의 공간



"집, 한 사람의 전부이자 세상"



2부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내가 깊게 공감하며 읽었던 건 이주에 대한 부분이었다.

존 버거의 [제7의 인간]이란 책을 통해 이민자들의 삶의 변화에 대해

좀 더 세밀한 시선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7의 인간이 많이 생각났다.

그는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원래 집이란 세상의 중심을 의미한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집에서 안전하고 익숙함 속에서 꿈을 꾸고,

실제로 존재하는 행복과 안정을 가진다.

그래서 집을 잃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막연한 불안과 위협, 혼돈 속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거다.

존 버거가 담아낸 공간 속에 중요한 주제는 '이주'이다.

그는 '이민자들의 삶은 세상의 중심을 뒤엎는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집 속에는 사람의 습관, 정체성, 그리고 기억들을 포함된다.

이민자들이 이주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막연한 불안과 희망을 품고

새로운 곳으로 가서 심기는 일이다.

그래서 존 버거는 존중과 공동의 연대가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기의 희망을 함께 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그가 여러 저서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의 글을 읽으며 가장 개인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세상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 필요한 가치인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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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집 잃은 이방인들의 임시 숙소로 만들어 인간의 소외를 극단화해서 제시했던 존 버거.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을 읽으며

사랑하는 이와의 낭만적 사랑과 지구를 근원적 집으로 만드는

인류의 연대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그의 따뜻한 시선에 마음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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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에서, 당신은 아주 작은 모습이었다.

당신의 그 조그만 나타남으로 인해 모든 것은 달라졌다.

철로 아래로 뚫린 통로에서 지고 있는 해에 이르기까지,

열차 시각표에 씌어 있는 아라비아 숫자에서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볼 수 없는 별들에서 내 입 속에 남아 있는 커피 맛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오래전에 내가 닿았던 우연의 세계는 이제야 하나의 방의 모습을 이루었다.

나는 집에 돌아온 것이다. p.118



존 버거가 제시한 연대와 사랑을 읽으며 우리가 서로의 집이 되어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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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의 한 줄 요약 : 이 리뷰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에게 보내는 저의 연서입니다.


@hannahbookshelf

e-mail : jinny41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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