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사 우종영의 [바림]이라는 책에서 오래 산 나무의 장수의 비결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람과 풍랑을 견디며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가 강인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이 이 '척박한 환경'이라는 말을 들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나무처럼 단단하게 자라가자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임옥상 작가의 <여기, 일어서는 땅> 전시를 보며 여러 부침 속에서 땅을 딛고 우뚝 서서 척박한 환경을 돌파해 가는 민중 예술가의 힘을 깊이 체험했다.
임옥상 작가는 민중 미술 작가이자 한국의 리얼리즘 미술 흐름의 주요한 작가이다.
그의 작업은 리얼리즘 > 대지 미술 > 환경 미술 등 이 나라의 땅과 자연을 캔버스에 옮기고 세월의 증인 역할을 한다.
1980년 당시 광주 민주화 운동과 박정희 정권의 18년의 유신 독재 시절 동안 그가 그려낸 대한민국의 산과 들의 풍경 속에선 그 시절의 아픔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산과 들, 그 시절의 풍경 속에 우리 민중의 삶이 단단하게 담겨있다. 제주 4.3 사건의 기억과 세월호 등의 아픈 시간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 '흙'은 대단히 중요한 소재이다. 처음엔 캔버스 위에 흙을 덧발라 채우고 그 위에 유화 물감, 먹물 등을 혼합해서 작업을 하다가 유화의 기름에 대한 불편함을 벗어던지는 대체재로 한지를 발견한다. 종이 부조 위에 물감을 덧바르거나 흙을 떠내서 작업한다. 흙, 물, 종이의 물성이 만들어낸 그의 작품 속에는 시대에 대한 그의 시선이 오롯이 담겨 있다.
흙의 소리, 2022, soil, mixed media, 390 x 480 x 300cm
흙의 소리는 대지의 신 가이아의 머리가 옆으로 누워있는 듯한 형상이다. 얼굴 뒤쪽에 입구가 있어 들어갈 수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가이아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두상 안에 있는 동안 태곳적 세상에 나와 어둠만이 남은 느낌이 들었는데 무섭기보다 따뜻하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흙과 숨소리가 가진 느낌을 잘 활용하기도 했고 거대한 크기가 압도하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흙이 가진 생명력과 자정작용은 우리를 먹이는 뿌리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돌아가는 우리의 근원이기도 하다. 가이야의 숨소리를 들으며 대지가 나를 품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작품을 만드는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여기, 일어서는 땅, 2022, soil mixed media 1,200 x 1,200 x 10cm
여기 일어서는 땅은 파주 장단평야 논에서 따온 흙으로 만든 대규모 설치 프로젝트이다. 가로 세로 12x12m의 대형 작품이 설치된 전시관으로 들어간 순간 이 작품에 압도되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은 흙 위에 인간과 흙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흙으로 된 패널 36개를 벽에 붙여 가로 세로 12x 12m 규모의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땅의 척박함을 딛고 계속해서 삶을 만들어내며 일어서는 게 우리의 삶의 여정이다.
얼굴-아침, 1995, Arcrylic on paper and clay mixed media relief, 240x180x20cm
땅 II, 1981, Ink, acrylic and oil on canvas, 141.5x359cm
흙 D5, 2018, soil, ink and arcrylic on canvas, 22.7 x 14.5cm
검은 웅덩이, 2022, & 대지-어머니, 1993
웅덩이 속에 검은 물이 가득 차 있다. 작가는 이를 '숨구멍'이라고 한다. 생태, 문명, 혹은 문화, 사회 등 어떤 관점이든 간에 눈앞의 웅덩이는 '지금' 현재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웅덩이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에서 회복해야 할 우리의 문제와 이슈를 한 번 더 고민하게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한다.
웅덩이, 1976, Oil on canvas, 127x127x4.5cm
웅덩이 II, 1980, Acrylic on canvas, 134.5x198.3x4.5cm
얼룩 I, 1981, Oil and sand on canvas, 144.3x198.5x5cm
땅 IV, 1980, Oil on canvas, 115x189x5.5cm
땅 81, 1981, Soil ink and arcrylic on canvas
웅덩이부터 땅 81까지의 작품은 광주 민주화 등 그 시절의 아픈 역사가 반영된 작품들이다. 이로 인해 임옥상은 계속 당국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된다.
귀로, 1983, Ink and color on basso-relievo in paper, 190.5x284x10.3cm
4.3 레퀴엠, 2018, Soil and arcrylic on canvas
4.3 레퀴엠은 제주의 오름을 그렸다. 이 속에는 여전히 4.3 사건의 아픔들이 그대로 녹아있다. 임옥상의 작품은 이러한 시선을 반영한다.
김씨 연대기 II. 1991. Arcrylic on paper relief, 144.3x200.5x7.8cm
심매도, 2019. Soil and arcrylic on canvas
북한산에 기대 살다, 2020, Soil and arcrylic on canvas
임옥상 작가는 민중 미술 작가이자 한국 리얼리즘 미술 흐름의 주요 작가이다. 그의 100여 권의 작가노트를 보며 작가가 침잠해 온 세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삶이나 생존'과 예술 사이에는 혼재될 수 없는 강이 있다고 생각한다. 삶이 척박한 사람들에게 예술을 향유할 심적인 여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예술이 흙이 되는' 임옥상 작가의 작업은 삶과 생존이 예술로 발현되고 있다.
나는 임옥상 작가가 정말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낭만보다는 생존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의 주요 소재는 자연과 흙, 그리고 삶의 터전이다. 그의 예술은 삶과 생존, 흙과 터전을 딛고 시대를 증언하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리얼리즘에서 대지미술로, 대지미술에서 환경미술로 이어지는 그의 행보는 치열하고 격동적이고 강인한 힘이 있다.
보리밭 II, 1983, Oil on canvas, 140.8x298.2x4.2cm
보리밭 II(1983)라는 작품에는 농업이 점점 어려워지는 경제 성장기에 전투적으로 생존을 향해 주먹을 쥐고 서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어떤 척박함도 장벽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우리 삶의 터전인 대지, 그리고 흙은 우리의 최초이자 최후이다. 우리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니까. 우리의 삶의 척박함, 정치적인 부조리, 환경의 위기, 그리고 그 안에 서 있는 우리는 미약하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터전에서 삶을 경작해 간다. 임옥상 작가의 작품 속에는 여러 부침 속에 땅을 딛고 우뚝 서는 마음, 척박함을 딛고 투박하게 돌파해 가는 민중의 힘이 담겨 있는 것 같다. 100여 권의 작업노트 속에 담겨있는 치열한 그의 농사는 작품을 통해 경작되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바라보며 내게 필요한 담대함을 충전한다. 나 역시 직업 세계에서 내 나름의 척박한 토양을 경작해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경작을 쉬면 땅은 다시 척박해진다. 어떤 상황과 장벽 앞에서도 무력해지거나 나약해지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자는 다짐 한다.
흙이 예술이 되는 게 아닌, 예술이 '흙'이 되는 임옥상의 세계. <여기, 일어서는 땅>은 척박함을 딛고 강인하게 나아가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