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노란 벽돌 길아

어쩌다 보니 프레젠터 7

by Dolphin knows

이후 경쟁업체와 따로 내정된 곳이 아니면 웬만하면 수주가 이어졌다.

기관 브로슈어, 백서, 사례집, 월간지 등등

마지막으로 그 회사를 나올 땐 사외보 월간 정기간행물 2개를 따 드리고 나왔다.

때론 한 번에 두 개가 동시에 돼서 대표님이 대표실로 따로 불러 금일봉을 챙겨주기도 하셨다.


두 번째 제안 때 그 '내정'의 부분을 알게 됐다. 발표 분위기까지 나쁘지 않았는데, 나중에 영업팀장님이 와서 그러시더라고 따로 불러서. 1등은 어쩔 수 없이 뫄뫄 업체에 줬는데 대신 다른 일 많이 줬다고

그 이후로 뭐랄까. 너무 '드라마나 소년만화'같은 생각이 지워졌다.

그냥 서류 준비하고 시안 수준 이상으로 뽑고 제안서 잘 쓰고 잘 발표해서 1등 하면 된다!

이게 전부는 아니었던 거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꽃길 걸었냐고?

아니 사. 약. 길.

캘리그래피가 취미인데 가끔 허튼소리를 써서 저퀄 포샵질 해서 놀곤 한다.


지난번 글에서 그 회사 대표님이 심계가 깊다고 하지 않았나. 바닥부터 올라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격적으로는 완벽하게 맞지 않아도 존경하는 편인데, 다양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다채로운 대접을 받으면서 되도록 속을 드러내지 않고 웬만한 패악질을 참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나는 그저 사람 자체를 대하는 것보단 이렇게 컴퓨터 앞이나 말없고 '공기를 읽을'필요가 없는 자료와 to-do리스트가 편한 사람이라 그런 분들처럼 위기에 잘 대응해내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자기 객관화가 안되어 그 대표님을 지 손안에서 쥐락펴락 하고 있다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부서장이었다. 그냥 보통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과는 생각과 의도가 남다른 인물이었다. 감정 자체도 너무 기복이 심하고. 뭐랄까 지금 생각하니 '동탁'같은 존재였달까? 내심 자기가 '조조'급 이라고 생각했던 것같은데 그 레벨까지 가려면 그렇게 자기의 생각을 무엇보다 '입으로' '소리로' 꽝꽝 내뱉어서는 안 되었다.

안 그래도 조직의 덩어리가 커지면 끼리끼리 문화가 발생하고 그게 실제 자기 이익이나 공과 연결이 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20대 때에 정말 대~단한 회사 두 군데에서 그런 걸 봤었다. 회의실에서 재떨이가 날아다니고 남자 간부들끼리 뺨을 치고 계속 무슨 모를 일들이 일어나고. 나는 어차피 피래미였으니 거기에서 그냥 오는 파편만 맞았지 내가 직접 방천화극을 정통으로 맞거나 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 부서장님의 대단한 활약으로 나는 또 이상한 나라의 직장인 1이 되고 만다.


수많은 상사들이 바뀌었다. 그 앞에서 말한 '성대리 스타일'도 그랬고. 그렇게 그 부서장이 감싸주고 커리어를 만들어 주려 애썼어도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랬다. 툭하면 갈렸던 상사들은 다들 어느 정도 일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나갔고, 나는 너무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부서장 특유의 갈라 치기. 사람들 맘에 독을 심는 건 거의 길드 마스터 급이었다.

꼭 대표님 핑계를 대면서 대표가 너를 어쨌다더라 저쨌다더라. 잘 지내던 사람들이 반목을 하고 갈라서고 서롤 상처 주고 결국 나갔다. 뭐 이상할 것도 없이 자기 라인의 사람들은 힘든 일에서 빼고 빛나는 일에 밀어 넣었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 사람들은 대표님이 보시기에도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미생은 매우 잘 만든 하이퍼리얼리티 드라마다. 그러나 현실보다는 확실히 순한 맛


사약길을 걸은 이유는 뭐 그거였다. 나 같은 잔챙이가 뭐라고 자기가 아끼고 숨겨놨던 직원에게 위협이 된다는 거였다. 수 없이 갈린 상사들이 그렇게 더미 취급을 당하며 사라졌다.

무엇보다 회사에서도 꽤 유명짜하고 나도 직접 들었던 '그분의 대단한 어록'이 수두룩했다.


"이 회사 돈은 대표가 내지만 내 스피릿으로 돌아가게 만들 거다. 대표가 내가 돈이 많다고 나 놓칠까 봐 불안해한다. -그리고 대표 욕 블라블라- 그렇게 돌아가게 만들고 내 이름으로 여기서 다른 사업 열거다. 대표가 학벌 콤플렉스가 있어서 블라블라"


"개 같은 x(떠나는 타 부서 상사에게)"


"여기가 군대는 아니지 하지만 일을 잘하는 것보다 나한테 네네 하는 게 중요해

(내가 일하다 쓰러지고 나서 출근했을 때)"


"지 년(라이벌 관계였던 다른 부서장)이 대표 xx 잡고 숨어있어도 결국엔..."


툭하면 직원들에게 했었던 이야기 "사표 써!" 그래 놓고 다음날 자기가 심했다며 사과를 하면 뭘 해.

사람 안 변하더라.


"약 팔러 가자(PT장으로 출발할 때 한 말인데, 이렇게 노골적이고 이상하게 말해야 하나 싶었다)"


"전문대 교수밖에 못하는 것들이 무슨 심사를 한다고 (피티가 끝나고 나와서 심사장에서 바로 붙은 대기실에서 소리침)"


압권!

"여자가 나와서 일해봐야 남자 손이나 타고 돈 벌어봐야 남편 기나 죽이지 집에서 밥이나 해야 해"

아, 이 말은 내가 모 기관 피티 직전 그 부서장이 동행했을 때 나한테인지 혼잣말 인지도 모르게 크게 이야기했던 말이었다.(시선처리가 마치 방백하는 배우와 같았다. 동아연극상 대상감 이었다) 이 이야기가 나온 상황 자체가 너무도 맥락이 없어서 아직도 기억한다. 돌아보니 나름의 숨은 맥락이 있었더라. 자기 라인의 직원이 전년도에 거하게 말아먹은 거였거든. 결국 그 일을 수주했는데 돌아온 건... 온갖 일 폭탄이었다.

현실은 언제나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


그러다 나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구급차를 타게 된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한 번은 과도한 일 밀어 넣기
한 번은 폭언과 협박 때문이었다.
난 아직까지도 그 실비 영수증을
스캔 떠서 가지고 있다.
난 그 영수증을 보며 다시는 꾹꾹 참지 말자. 누구도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 말게 하자.
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가장 진상 클라이언트 두 명과 동시통화를 시키면서 교정을 보게했고 또 그 와중에 끊임없이 자리로 불러 입찰 관련 서류 정리를 내게 시켰다. 엑설런트도 아니고 하나씩, 하나씩 말이다.

(입찰 서류 정리...까만건 글씨 하얀건 종이였는데 정신을 부여잡고 한 단락씩 읽고 의미파악을 했다. 또 그전에 여러 일에 사용했던 블록화 기술을 서류 정리에 적용하니 그렇게 어렵진 않았고, 어느 새 대부분의 입찰서류 준비에 내가 보조자가 되어 있었다.) 웃긴 건 일단 해내니 밀어 넣고 토해낼 때까지 시킨다는 거다. 그러다 내가 쓰러졌고 엠뷸런스가 왔고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대표님이 지켜보다가 나를 다른 부서로 분리시켜주시기로 하고 회사 뒤에 공지를 걸었는데 그것 때문에 또 한 번 부서장이 뒤집힌 거다.

워낙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고 말도 제멋대로라... 아휴.

따로 불러 온갖 협박을 했다. 그거 취소하고 싶다고 해라. 너 더 이상 차별대우 안 하고 잘해줄 테니.. 그때 참 이상했다. 본인은 절대 사람을 공평하게 대한다고 나한테까지 그랬으면서 왜 그때 그 말이 나왔는지. 복잡한 마음으로 나왔는데 집에 가다가 한 쇼핑몰에서 위가 꼬여 쓰러졌다. 엄마는 크게 화가 났고 나를 싣고 가는 구급차 안에서 부서장에게 전활 했다.

"애 내일 회사 못 가니 그리 아시라고, 여기 구급차라고"


그 회사에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 좋았고,
제안의 메커니즘과 전 과정 그리고 그 제안이 실작업화 되는 부분을
전부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그 부서장은 입찰, 한마디로 돈을 따다 주는 일에 사람들이
공을 차지하려 경쟁하도록 이상한 구도를 만들었지만.
내겐 보였다. 입찰을 할 수 있게 실적증명을 만드는
'실제 프로젝트 수행'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단 걸.
그리고 실제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 해야
제대로 된 제안서 및 피티를 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특히, 질의응답을 할 때 실제 작업 경험을 담백하게 설명하자
시큰둥했던 심사위원들이 마음을 열고 수주시켜준 예가 종종 있다.


내 몸과 맘의 건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 회사에서 대상포진 걸렸던 것은 유도 아니었다. 전 회사 대표님과 이사님은 상당히 인격적이었고 일을 되게 하려고 했었다. 아마 본인이 회사를 책임지는 입장이라 더 그랬을 거다. 그러나 그 부서장은 달랐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독버섯처럼 거기에 기생하고 뭔갈 잡으려 했으니 부서 자체가 병이 안 날래야 안 날수가 없었다.

또 불안했다. 내가 그 회사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이 인쇄기반에서 전부 웹 기반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나라장터라는 걸 들어가 보면 온갖 나라에서 진행할 프로젝트를 할 업체를 구하는데... 점점 파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두렵고 불안했다.


결국 대표님과 세 번 정도 그만두겠다 말한 뒤에야 그 회사를 나올 수 있게 됐다.

그 대표님이 하신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처음엔 그 부서장이 뫄뫄 씨를 먼저 칭찬했어요. 그래서 지켜봤죠. 뭐 잘하더라고요. 그러다 모 업체에서 직접 연락이 왔어요. 뫄뫄 씨가 프로같이 일 해줬다고 그걸 전달했더니... 아마 그때부터 변한 게 아닌가 싶네요. 내가 너무 뫄뫄 씨를 그 사람 앞에서 칭찬했나 봐요"

그래 어떤 시점이 있었다. 일에 파묻혀 파악을 못했던 거지. 대표님이 뭐 죄가 있나. 그 부서장이 문제였지 뭐. 고맙단 인사를 하고 나왔다.



잘 키운 법사 캐릭이 죽은 사람을 살리리니 (출처 : 메이플스토리 법사 캐릭터 비숍)



다행히 그 회사를 다닐 때 부서장 같은 사람만 있진 않았다.

지금도 내게 안부도 묻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분들도 계시고 혼자 계단에서 울 때 격려해주셨던 분들도 계셨다. 또 그 당시 나와 친했던 언니가 회사 근처 외국계 금융기업의 중역이라 점심때 종종 밥을 먹었는데 어느 날 예쁜 목걸이와 무슨 시계 같은 걸 주더라고. 녹음기였다. 방어템이라고 했다. 고마웠다. 내가 회사에서 힘든 걸 아니까 점심때 굳이 회사 근처로 차까지 끌고 와 케이크를 잘라주던 내 친구. 부서장과 그 무리들한테 기죽지 말라며 내 생일에 일부러 회사에 생일케잌과 꽃다발을 보낸 동생 등등...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려던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내가 살아있지 않나 싶다. 이 웬수는 절대 안 잊으려고.


대표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짐을 정리해 나오니 회사 앞에 방어템을 장착해 준 법사(아 그러고 보니 법사 맞네. 쌀국서 변호사 땄으니... 역시 사람은 템빨이다. 나처럼 갑질 안당하고) 언니가 있었다.

끝나는 시간 딱 맞춰서 그 언니가 차를 몰고 오더니 타라고 하더라. 장롱면허를 부활시켜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12월 31일이었다. 언니는 나를 남양주 쪽으로 데려가 스테이크를 사줬다.

겨울이고 음식도 가볍진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체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좀 있다 친구들을 만났더니 단박에 안아주고 잘했다고 하더라. 뜬금없이 파티 분위기 여서 읭? 했다.


sticker sticker


역시 '누구랑 있느냐'가 중요하구나. 그걸 확실히 마음에 새기게 됐다.


나는 야 애비 셋 여퀴벌레~(출처 : 바이두 닷컴)



내가 남겨두고 온 그 노란 벽돌 길 끝 에메랄드 캐슬은 어떻게 되었냐고?

뭐 그 회사는 건재한데 그 부서장이 결국 대표님이랑 한 판 붙고는 나왔단다. 그 과정에서 아끼던 '여포'같은 직원에게 '방천화극' 제대로 꽂히셨다고... 그걸로 끝나면 좋게. 꼬셔서 같이 경쟁사로 간 부하직원 시켜 그 회사의 자료 빼내다 들켜 참으로 곤란하게 됐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