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못 본 시간으로부터 먼 옛날, 항상 격동에 휩싸이던 먼 먼 극동 아시아의 한국이란 나라에 개도 안 물어갈 잉여 한 명이 자라고 있었다. Sci-fi라면 환장을 했고 어슐러 르 귄과 코니 윌리스, 제임스 P. 호건 선생님은 이 모자란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제 멋대로 정신적 스승 삼아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빠심을 수련했다고 전해진다. 또, 한국에서 그렇게 마케팅을 때려 부어도 안 팔린다는 스타워즈 트릴로지를 프리퀄, 시퀄, 스핀오프 물까지 개봉 첫날 섭렵을 하며 매년 5월 4일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프사를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전해진다. 그 잉여의 전투력, 지력, 매력은 제로! 다만 주접클로리언 수치는 최상이라 툭하면 '별 하나에 R2D2, 별 하나에 C3PO, 별 하나에 K-2SO, BB8... 인간 따위 뭐야! 드로이드가 최고다!'라고 했다더라.
모든 스타워즈 영화에 도입부가 있듯이 나도 나름의 도입부를 써 보았다. 그냥 잉여가 잉여 짓 한 거고 중요한 건 다음 내용이다.
PT자료, 지금은 제안서로 한정 지으면 괜찮을 듯하다. 제안서를 만들 때 항상 만나게 되는 것이 비전체계도 혹은 전략체계도 이다. 보통 공공문서나 브로슈어에서도 왕왕 등장하는 그림이다. 이 비전체계도는 그 사업을 홍보하는 도입부에 꼭 들어간다.
이 비전을 북극성으로 삼아 다른 것들이 착착 위로 올려지는 형상이다. 개념도를 읽어보면 그렇다.
이 비전체계도는 밑에서 위로 위에서 밑으로 읽어도 되지만 '최고의 비전'이 없이는 하위의 실천과제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초반엔 그랬다. 제안서나 설명자료를 기획 시 기존 로 데이터(raw data)를 수집할 때 이 친구를 발견하면 '응 형식적인 거'이러면서 세부 실천사항 부분 구체적으로 보이는 사업부분만 더 신경 쓰고 이건 그냥 '복붙'했다.
그렇게 남의 자료를 만들어줬을 땐 뭐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냥 전략 과제들이 장표 화가 잘 됐나 이걸 잘 체크해 주면 됐다.
그러나 직접 제안서를 기획하고 또 발표자로 섰을 때,
이 비전 혹은 전략체계도의 중요성을 그제야 깨달았다.
기업의 예를 들면, 슬로건이나 기업의 비전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을 홍보매체에 쓰라고 카피라이터를 즙짜내고 갈아서 만든 게 아니라. 기업의 아이덴티티와 방향성을 드러내는 깃발 같은 거다.
홈페이지에 있는 말들 홍보자료에 있는 말 그중 비전 체계도는 잘 파악하면 그 회사와 사업의 이해하는 마스터키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제안서를 쓸 때 저 비전체계도를 그냥 형식적인 거라고 내용 다 때려 넣고 나중에 복사해 붙여버리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미안한데 제안서의 완성도를 보장할 수 없다. 적어도 내 경험상으로 그랬다.
제안서를 쓰는 기준인 제안요청서 보통은 RFP(Request for Proposal)로 줄 여말 하는 문서의 심사기준엔 '사업에 대한 이해' 부분이 꼭 포함돼있다. 일을 수행할 능력과 인프라가 중요하지만. 관건은, 사업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했느냐는 거다. 문제를 잘 알아야 답을 잘 푼다. 사업수행도 마찬가지고... 제안을 요청하는 기관이나 기업은 바로 그 점을 궁금해한다. 그 사업을 이해할 수 있는 마스터 키가 바로 비전체계도 안에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 중 덕만과 미실의 신권 논쟁 장면. 미실 새주께서 신권을 3개의 나라와 세력으로 비전(혹은 전략)체계도화 하신다. 천재 작가님께 조만간 큰 절 드리러 갈 거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은 덕만(후에 선덕여왕) 앞에서 덕만이 말하는 신권의 공유가 실제로 가능하냐 대한 이야기를 맨 손으로 프레젠테이션해 다시 보여주고 있다. 네가 말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말 대신 저렇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까는 것이다. 이 분이 왜 역대 한국 드라마에 나온 빌런 캐릭터 중에서도 최고 존엄에 속하는지 이 장면을 보고 깨닫게 됐다. 소통을 할 줄 아는 빌런인 거다. 너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거다!라고 그래서 드라마 속에서 덕만은 미실의 최후를 보고 비록 악인이었지만 경의를 표했다. 이걸 보면 결국 이 프레젠테이션이 마음과 마음 생각과 생각을 이어 납득을 자아내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실제로 작업할 때 비전체계도를 수시로 확인하며 장표 구성을 했다. 다 마쳤을 때 이 비전체계도와 장표의 논리구조와 내용이 잘 맞아떨어지고 주요 내용이 녹아들어 갔으면 제안, 즉 PT자료의 마무리라고 보고 그때에야 제출을 위해 디자인을 다듬었다.
"우리가 요청한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그리고 그 '이해'한 내용을 위해 너희가 가지고 있는 수행능력을 얼마큼 적절히 발휘할 거냐"가 보통 경쟁 PT제안서에 들어갈 내용이다. 기획자는 바로 이 부분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오 나의 공주님, 오 나의 장군님
영화 '로그 원'의 마지막 장면. 레아 공주님이 등장하셔서 로그 원 부대와 반란군의 피, 땀, 눈물을 받아 들고 'HOPE!'라고 하신다. 이 영화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어야 했는지를 보여주었고, 레아 공주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그 희생이 바로 '희망'을 이루는 거라고 말씀하셨을 때...(나 잠깐 울고 와야겠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이 장면이 영화 전체를 관통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