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순간 떠오른 그녀의 얼굴
그녀가 떠난 후, 그의 일상은 더욱 치열하게 흘러갔다. 이른 아침부터 이어지는 학교 수업, 도서관에서의 공부, 밤늦은 아르바이트까지—하루하루가 쳇바퀴처럼 반복되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떠오르면 짧은 안부를 남겼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건강 잘 챙겨.”
그녀는 늘 반갑게 답해주었다. 한국에 돌아가 싱가포르 국제학교에 취업했다는 소식도 전해왔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방학이 되면 미국에 갈 수 있어. 그때 꼭 만나자.”
그녀의 희망에 찬 말에, 그는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영주권 신청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 그는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그녀에게 물었다.
“어떤 전공이 좋을까?”
“체육 교사 어때?”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끈기 있고, 몸 움직이는 것도 좋아하잖아. 미국에서도, 해외에서도 잘 맞을 거야. 방학도 있으니까 여행하기도 좋고… 그리고—”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덧붙였다.
“그냥,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뜻밖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영주권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교직 공부에 뛰어드는 건 너무 큰 모험이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학비도 마련해야 했다. 결국 그는 보다 현실적으로 취업이 잘 된다는 전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겨울밤, 늦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빨간 신호에 멈춰 있던 순간, 뒤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차는 여러 번 회전하며 도로 한가운데로 밀려났다. 그 찰나, 파노라마처럼 삶의 중요한 장면들이 스쳐 갔다. 가족들의 얼굴, 미국에 처음 도착했던 날, 막막했던 첫 아르바이트. 그리고… 그 사이로 또렷하게 떠오른 얼굴은 그녀였다.
차가 멈추었을 때, 다행히도 그는 기적처럼 멀쩡했다. 에어백 덕에 큰 부상은 없었지만, 차는 완전히 망가져 폐차를 피할 수 없었다. 경찰과 보험사 직원이 오가며 절차는 이어졌지만,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그녀에게 알려야겠다.’
집에 돌아온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한국은 막 아침을 맞을 시간이었을 터였다.
“여보세요?”
“누나…” 목소리가 떨렸다.
“어? 무슨 일 있어?”
“사고가 났어.”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지금 병원은?”
“몸은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그런데…”
“그런데 뭐?”
“… 사고 순간에 누나 얼굴이 떠올랐어.”
잠시의 침묵. 그리고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
“정말 괜찮은 거야? 정말?”
“응, 정말 괜찮아. 그냥… 갑자기 연락하고 싶었어.”
“다행이야… 그래도 몸이 괜찮다니까. 곧 방학이잖아. 미국 가면 꼭 만나자. 못다 한 얘기도 하고, 여행도 가고.”
“응. 기다릴게.”
전화를 끊고 난 후에도 그녀의 말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사고의 충격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다시 만나자는 그녀의 약속이었다.
그날 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그녀를 다시 만나러 가겠다고.
이번에는, 꼭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겠다고.
그리고 마음속으로 날짜를 새겼다. 곧 그녀가 돌아올 그날, 공항 게이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