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엄마의 신념: CAL Prep 방식의 차이를 드러내다
션의 입주 날,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 속에서 나는 그의 룸메이트를 만났다. 션의 대학 생활을 위해 내가 품었던 수많은 바람과 걱정 중에서, 누구와 한방을 쓰게 될지가 단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제발 대학의 전산 시스템이 우리 션에게 최상의 인연을 맺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었다. 션에게 내가 지금껏 감사히 누렸던 만남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랐는데, 역시 그 기도는 이루어졌다. 션의 룸메이트는 정말 인상 깊고 성실한 학생으로, 보자마자 남달라 보였다. 나는 곧 그가 ROTC를 통해 학부 과정부터 의대 과정까지 학비 전액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온 훌륭한 학생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단순히 학업적으로만 우수한 학생이 아니었다. 어릴 적 한때 나의 꿈이었던 육군사관학교(West Point)를 실제로 최종 합격했지만 가지 않았고, Stanford 대학교와 Yale 대학교에서도 합격 제안을 받았지만, 결국 버클리를 선택했다고 하니,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정말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런 엄청난 성취를 이루기 위해 그가 얼마나 놀라운 헌신을 해야 했을지, 그저 깊은 존경심을 감출 수 없었다.
션의 룸메이트는 18살의 신입생이었다. 그런데 서로의 아들을 소개하며 내가 무심코 션이 16살이고 이미 3학년이라고 말하자, 미묘한 분위기 변화가 일어났다. 의도치 않게 그 아이에게 쏠려야 했던 모든 주목을 빼앗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코 그의 스포트라이트를 옮겨 오려는 의도가 아니었지만, 션의 룸메이트와 그 부모님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을 느꼈다. 션의 전공이 ‘응용수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룸메이트의 아버지는 재치 있게 “아들아, 바로 이 방에 앞으로 너의 수학 과외 선생님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는 션의 놀라운 성취에 대한 즉각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그의 룸메이트와 부모님으로부터 나온 호의적인 칭찬이었다.
나는 한동안 이 순간을 곱씹으며, 이 두 명의 주목할 만한 젊은이들 사이의 대조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룸메이트는 의심할 여지없이 부러움과 칭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 역시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모든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나는 션의 성취를 룸메이트의 성취와 절대 바꾸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사실 그 룸메이트가 겪었을 고된 여정, 군사 학교 전문 코치와 함께 준비했던 과정까지 포함하여, 그 길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그리고 그에게는 앞으로 더더욱 힘든 길이 남아 있다. 4년의 학부 과정, 그리고 의대, 레지던시, 전문 훈련을 포함하여 보통 7년에서 11년 더, 혹은 그 이상에 달하는 힘겨운 의학 교육을 마쳐야만 비로소 완전한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의대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으로서 나의 아들이 그 길과는 전혀 맞지 않는 아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에, 앞으로도 션은 만져 보고, 경험하고, 가 보고, 좌절하고, 또다시 두들겨 보는 그런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말 잘하는 것을 찾아내서 남을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인재가 되길 바라고, 무엇을 하더라도 지금 나의 일처럼 막대한 보람을 느끼는 길을 가게 되기를 소망할 뿐이다.
우리 션에게는 시간이 아주 많다. 그런데 참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신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졸업한 학생들이 대체 뭘 할 수 있을까요?” 션에게 있어서 이것은 한계의 문제가 아니라, 확장된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만약 예정대로 18살에 대학을 졸업한다면, 그는 엄청난 유연성을 얻게 된다. 즉시 대학원 과정을 밟거나,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경력을 쌓아 나갈 수 있다. 다른 학생들이 겨우 학부 졸업을 할 때 션은 두세 개의 석사 학위를 더 받거나 일찌감치 박사 과정에 돌입할 수도 있다. 만약 졸업을 늦춘다면 교환 학생으로 다른 나라에서 공부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고, 여름 방학에만 인턴을 구할 것이 아니라 아예 한 학기, 혹은 1년을 통째로 인턴십 경험에 할애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년 이내에만 돌아가면 다시 재입학이 된다는 제도를 이용하여, 충분히 방황해도 괜찮다. 어차피 언제 돌아가도 1년만 더 공부하면 졸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안 가본 길을 떠나 보는 것도 괜찮고, 새로운 것을 배워 보는 것도 좋겠다. 빈민 국가에서 난민 구제 활동을 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고, 이참에 큰돈을 벌어 보는 경험 또한 귀할 것 같다. 이 한도 끝도 없는 모든 것을 그는 이미 갖춘 기초 지식과 성숙함을 바탕으로 해낼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전공을 바꾸지 않고 계속 이어 나간다면 그 학위는 앞으로 기술, 금융에서부터 공학, 데이터 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로 나아갈 수 있는 강력한 여권과도 같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내가 점점 더 깊이 포용하게 된 철학과 일치한다. 이는 션의 학업 궤적이 그의 룸메이트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현재 교육 환경의 중요한, 그리고 종종 지치게 하는 한 단면을 어떻게 조명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렇게나 노력하고 고생했는데, 룸메이트는 이제 제로부터 다시 시작이다. 모두가 이 끝없는 ‘경쟁(rat race)’에 매달리고 있다. 밤샘 공부, 가장 힘든 과목 수강, 그 와중에 아이들을 스포츠 게임에서 연습장으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대회로, 캠프로, 봉사 활동으로 끊임없이 태워 나르는 부모들, 이 모든 것을 수년간 반복하는 것이다. 4년제 대학의 문턱을 넘기 위해, 즉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만 적어도 3~4년간 반복되는 이 고된 주기는 그야말로 광기처럼 느껴지고, 실제로도 그렇다. 경쟁은 해마다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마치 대학 신입생이 되기도 전에 암 치료제라도 개발해야 할 것 같고 국가를 대표해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따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극단적이고 냉소적인 비약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대학 입시 컨설턴트로서 늘 들여다보게 되는 실제 케이스들은 정말 눈물겨울 지경이다. 하지만 이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운 좋게 살아남아 겨우 대학 문턱을 넘었다고 해도, 새로운 경쟁과 문제들이 곧바로 불거진다.
많은 신입생들이 대학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완전히 지쳐서, 그저 대학에 도착하기 위해 쏟아부었던 고된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휴식을 갈망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제 집을 떠나 홀로 생활하게 되고, 먹이고 재우고 태워 나르던 부모님들이 한 방에 인생에서 퇴장하게 된다. 그러한 완벽한 자유와 함께 두 손에는 꽤 많은 돈도 쥐게 되는 시점이다. 더욱이 대학의 교양 과목들은 대규모 주립대의 경우 적게는 300명에서 700명, 심지어는 인기 있는 입문 수업 강의의 경우 2,000여 명 이상까지 수용하는 대규모 강의가 많다. 이러한 환경에서 학생들은 고등학교에서는 아예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자유를 갑작스럽게 느끼며, 주의력 분산 및 혼란을 더 크게 겪게 된다. 고등학교에서 이수한 고난도의 AP 과목들 덕분에 대학교의 입문 수업 정도의 과정들은 겉보기에 쉽게 느껴질 수 있어, 학생들은 슬슬 수업을 건너뛰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이는 금방 최악의 습관이 될 수 있고, 특히 진도가 빠른 쿼터제 시스템에서는 초반에 몇 과목이라도 실패하면 회복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는 학부생의 누적 GPA가 분기 말에 2.0, 즉 C 학점 미만으로 떨어지면 자동으로 학사 경고를 날리게 된다. 이는 한때 반에서 최고였던 우등생들이 갑자기 당황하거나, 의욕을 잃고 헤매기 시작하는 악순환의 시작이 되는 경우가 된다. 어떻게 견뎌 낸 고교 생활인데, 또다시 그 능력 넘치는 학생들로만 선별하여 구성된 캠퍼스에서 이제 처음부터 4년을 견뎌 내야만 한다.
CAL Prep 방식을 통해 신중하게 구축된 션의 길은 이러한 ‘생존 경쟁’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이자, 초기 대학 생활의 많은 혼란을 우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션이 성숙함, 자기 훈련, 그리고 탄탄한 학업적 기반을 제공하여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성공하도록 돕는 것이다. 나이는 많이 어리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진학한 지금까지의 모든 CAL Prep 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비결은?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흔하디 흔한 속담처럼 ‘시작이 반’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가을 학기에 대학에 아예 발을 들일 때부터 이미 졸업 요건 절반 이상을 다 가지고 들어가는 학생들이다 보니, 마음가짐 자체가 새로 4년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따 놓은 학점 60~70학점을 다 인정받고, 이제 50~60학점만 더 수강하면 난 이 학교 졸업생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120~130학점으로 대학을 보통 졸업하게 되는데, 그것은 4년 이상에 걸쳐 총 40과목의 수업을 이수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우리 CAL Prep 학생들은 대부분 70학점을 이미 인정받고 들어가 나머지 50학점만 채우면 졸업한다. 쉽게 비교하자면 수업 40과목 대 17과목의 차이인 것이다. 이것은 학업 능력을 떠나서, 시작부터 절반 이상을 채우고 시작하는 여정이다 보니, 바보가 아니라면 그렇게 애써 들어간 학교를, 이제 수업 17과목만 더 수강하면 되는 최고 명문대 졸업 기회를 놓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 이미 수강한 과목들을 도로 다 다시 수강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여정으로만 느껴졌던 나의 대학 생활에 비교해 본다면 션을 비롯한 CAL Prep 고교의 이 방법은 힘들고 위험천만한 전통적인 대학 입학 방식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제시하며, 열정과 목적, 그리고 비할 데 없는 기회를 위한 길을 열어 준다고 본다.
사흘간의 꿈같던 아들내미와의 만남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면서 내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했지만, 무엇보다 깊은 감사함이 자리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6주가 지났는데, 나는 그가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그를 홀로 남겨 두었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단 한 번, 아주 긴급한 문제로 20초 남짓의 짧은 전화 통화를 했을 뿐이다(물론 문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고 있다). 이런 나의 소통 방식은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특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30년 전에 겪었던 일이 하나의 큰 흉터가 되어 아직도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전화를 먼저 하는 것을 많이 어려워한다. 매일 엄마와 다정하게 통화를 했던 학생인 Ian에게 나의 상처를 털어놓자, “정말 상상도 안 가요!”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있다.
나의 엄마는 내가 11살 때 갑작스럽고도 전혀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셨다. 반대편 차선 운전자가 운전 중에 갑자기 심장 마비로 사망하면서 그대로 가속 페달에 발을 얹은 상태에서 차선을 이탈해 엄마의 차와 정면으로 충돌한 말도 안 되는 사고였다. 나는 종종 “우리 엄마는 나에게 어떤 엄마였을까” 하고 자문하곤 했다. 언니와 내가 완벽하게 동의하는 한 가지는 바로 이것이다. 만약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우리는 둘 다 반드시 하버드에 입학해야 했을 것이고, 그 외에 선택지는 아예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엄마는 언니가 올백을 맞아오면 시골에서 그건 당연한 거라며 자만하지 말라고 하셨고, 올백을 못 받아오면 앞으로 대체 어쩌려고 그러냐며 속상해하셨다. 엄마를 함께 추억하는 모든 사촌 언니들과 오빠들은 성적표 검사를 하던 작은엄마, 숙모의 모습을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엄마가 사고 난 지 딱 하루 만에 돌아가신 후,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는 혼자 서야 해.”, “나는 혼자야.”, “나는 강해져야 해.”라는 생각으로 어린 나이부터 빠르게 독립적인 삶을 추구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던 엄마에게조차 죽음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에게도 언제든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어릴 적 엄마가 돌아가신 후 가장 무서웠던 것은 아빠마저 하늘나라에 가신다면 나는 바로 고아가 되리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994년 4월 8일 그날 아침, 엄마의 사고를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나였다. 금요일이어서 언니는 학교에 갔고, 나는 몸이 아파서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하루 쉬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 온 지 겨우 3년째였고, 나는 법적인 문제나 응급 상황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두 명의 형사가 갑자기 집 현관문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부모님이 미성년자인 나를 집에 혼자 놔두고 출근했기 때문에 날 잡으러 왔다고 생각해 지레 겁을 먹었다. 엄마가 사고를 당해 응급실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는 오토바이 수리점에서 일하고 계시던 아빠께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연락이 바로 닿았고, 아빠는 곧바로 집으로 오셨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아빠를 USC 메디컬 센터로 안내해야 했다. 엄마가 그곳으로 이송되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들어서서 ‘여성 센터’라는 간판을 보고, 엄마는 여자니까 분명 그곳에 계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산부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다가 내가 잘못된 곳에 왔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방황하는 우리를 발견한 한 분이 나의 서툰 설명을 듣고는 응급실로 안내해 주었다. 현관에 나타난 형사들을 만나고부터 엄마를 애타게 찾아 헤맨 이 모든 시나리오가 전화가 울릴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혹시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이 사고를 당해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까?’라는 불길한 상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는 고약한 트라우마가 되어, 나는 여전히 누구에게 먼저 전화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다. 전화벨이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울리는 동안, 나의 몹쓸 상상력은 늘 상대방을 죽음의 문턱까지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역사는 내가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자녀들에게 무심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상실감에서 비롯된 강렬하고 보호적인 사랑으로 나의 아이들에게 필사적으로 독립심을 길러 주었다. 정말 아무런 예고 없이 하루아침에 떠나 버린 나의 엄마…. 그렇기에 나는 우리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내가 언제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그리고 강인하게 자립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이것은 결코 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회복 탄력성을 통해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자 함이었다. 또한 어떤 전화 통화로도 전달할 수 없는, 내가 믿는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섭리에 대한 나의 변함없는 신뢰와 믿음이 담겨 있었다.
이제 션이 버클리에서 잘해 나가고, 학업적 난관을 헤쳐 나가며, 조용한 자신감으로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확신한다. 이러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선택들이 단지 ‘옳은’ 것을 넘어, ‘필수적인’ 것이었음을. 그의 놀라운 독립심, 조용한 강인함, 그리고 기쁨에 찬 적응력은 내가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던 것 그 이상으로 실현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에게 남기고자 하는 영원한 유산이자, CAL Prep을 지탱하는 변치 않는 철학의 원천이다.
나는 부모로서 아이들의 성공적인 독립을 최우선시한다. 동시에 나는 선생님으로서 우리 학생들의 성공적인 독립을 최우선시한다. 그게 나의 부모로서의 사명, 선생님으로서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