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문화 충격 그리고 바바리맨

by hannah

2012년 여름, 남편과 연애할 때다. 나름 요조숙녀 흉내를 내며(남편은 내가 그렇지 않은걸 첫눈에 알았다고 했지만) 점잖은 척 연애를 이어가고 있었다. 단정한 스커트에 작은 토트백을 매고 한껏 단장하고 나타나는 나를 보며, 남편은 가죽 스커트에 해골 무늬 민소매티를 입은 내 모습이 오버랩으로 보였다고 했다(남편이 좀 편해지고서는 조신한 복장을 해본 적이 없으니 결과적으로는 그가 옳았다. 복장이 자유로워지니 생각이 날개를 다는 듯했다).


햇살이 눈부신 한여름 오후, 우린 미술관 데이트를 하고 홀본을 거쳐 블룸스버리를 향해 걷고 있었다. 런던 센트럴은 1년 365일 붐빈다. 관광객이 늘 북적이고 유명인사도 자주 마주친다. 특별한 이벤트가 매일 일어나서 특별해 보이지 않는 축제 같은 도시 런던, 그날은 zone1 도심 내를 가로질러 환경보호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피켓을 들고 선두에 선 무리가 보인다. 아...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무도 옷을 입지 않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사람의 심한 맨몸을 목욕탕이 아닌 곳에서 처음 본 나는 비주얼 쇼크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은, 영국이 독일처럼 원전건설을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훨씬 독립적인 에너지 정책을 쓸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며 시사적 관점으로 퍼레이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길고 긴 행렬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우리 쪽으로 오는 거지...' 동공이 초점을 잃고 헤매는데, 올누드로 인라인을 탄 장발의 남자가 손을 내밀며 우리 쪽으로 빠르게 접근해 온다. 남편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한다. '여긴 내 여자친구 한나, 여긴 내 룸메이트 잭.'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려다 잭의 중요부위에 눈이 갈까 얼른 멈추었다. 그렇다고 로봇처럼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니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 같아 내가 의식하고 있다는 걸 들킬 것 같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잭이 무리를 따라잡기 위해 bye bye 멀어져 간다. 다음에 만나요, 란 해맑은 외침과 함께. 충격이 가시지 않아 그날 저녁 남편과 뭘 했는지 모든 기억을 상실했다. 이후 남편이 다른 플랏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다시 잭을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해맑게 인라인을 타고 오던 나체의 그의 모습이 오래오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드'에 어떤 정치적, 철학적 의미를 씌워 이야기하자면 방대한 참고문헌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개인적 의견이 다를 것이고 허용의 정도나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다를 것이다. 문화적 차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저 내 경험에 비추어 몇 마디 해보자면, 벗는 당사자의 의도와 장소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해변에서 비키니 윗도리를 벗고 있는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이 의식하지 않으니 누구도 오래 응시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몸은 그냥 몸 일 뿐, 성적 대상화의 필터를 거치지 않는 듯 보인다. 모든 이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장담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시선의 폭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잭이 속한 환경운동단체 역시 (되도록이면 많은) 주의를 끌기 위해 누드를 이용했을 뿐 그들이 주장했던 바는 '에너지 절약'이었다. 물론 그 무리에 그저 벗는 게 좋아서, 벗고 싶어서 나온 사람이 없었을 거란 확신은 없지만.


1997년 추운 겨울, 난 아침 7시까지 학교에 도착하기 위해 6시 40분에 집을 나선다. 어두컴컴한 골목을 돌아 큰길로 나가는데, 내 시야의 사각지대에 있던 한 건물 입구에 바지를 종아리까지 내리고 '어이~'하고 나를 부르는 남자가 있다. 더벅머리에 콧수염까지 있던 남자는 한겨울 추위를 못 견뎠는지 여성용 팬티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못 봤다. 날도 밝지 않은 상태였는데... 팬티스타킹에 눌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여준 게 없지만 의도가 불순해 '변태'로 기억될 그는, 아무 반응 없는 내 뒤에서 주섬주섬 바지를 올렸다. 내가 웃으면 굴욕감에 그가 쫓아올까 봐 친구와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잰걸음으로 뛰다시피 걸어간 나는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실소를 터뜨렸다. '아저씨,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하나도 안보였어요.'란 피드백을 혼잣말로 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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