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도 시댁을 자주 찾았다. 처음으로 내게 웨일스 집으로 동행하자고 한 날, 남편은, 강아지를 입양하려면 그 강아지가 엄마와 있는 모습을 봐야 한다는 이상하지만 말이 되는 논리로 나를 초대했다. 런던에서 기차로 세 시간. 북웨일스 끝머리, 위로 뻗은 작은 peninsula(반도)의 아름다운 관광지였다.
만 오천 여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닷가 작은 마을. 우리네 어촌을 떠올리고 갔던 나는, 소규모지만 제법 도시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는 다운타운에 놀라고, 실제 어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곳(주로 관광업)이라는 사실에 또 놀라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어딜 가나 탁 트인 바다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데 감격했다.
시내에서 5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residential area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나오는데, 주변에 어떤 상가 건물도 없이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다. 서로를 마주 보거나 옆으로 길게 늘어선 2층 집들이 가지런하다. 시댁이 자리한 곳은 1970년대 지어진 주택단지로, 1979년 시부모님이 처음 이사와 이웃들이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아이들을 길렀고 같이 나이 들었고, 그중 세 분은 지난 5년 안에 세상을 떠나셨다. 기억하는 한 늘 이사를 다녔던 내 과거와는 무척 다른 남편의 히스토리가 흥미로웠다. 어떻게, 한 집에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지? 난 초등학교 6년 동안에만 여섯 번을 전학 갔는데!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성격을 갖고 계신 시어머니는 동네의 사교계를 주름잡고 계신데, 코로나 이전에는 많은 이웃들의 요청으로 홈파티나 가든파티를 자주 개최하셨고 항상 이웃들의 대소사를 제일 먼저 접하는 소식통이시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웃들이 제일 먼저 찾는 상담가시기도 하다. 그런 사교적인 어머니 덕분에 결혼 전에는, soon-to-be daughter in law 곧 며느리가 될 아이로, 결혼 후에는 제인의 며느리로 미처 소개받지 못한 이웃이나 어머님의 친구분들도 이미 전부 나를 알고 계셨다. 문제는 내가 내성적이라는 것인데(그룹 크로스핏 훈련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장마비가 올 뻔한 적이 있음)... 심한 I는 아니지만, 때에 따라서는 E인 척도 가능한 I이지만, 극강의 E 시어머님과 함께 다니다 보면 심장을 부여잡고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순간을 끊임없이 경험한다. 제일 어려운 부분은, 어머님이 친구분들과 통화를 하시다가 난데없이 옆에 있는 내게 수화기를 넘기시는 경우다. 사교적인 어머니에겐 전혀 에너지 소모가 없는 일인지 몰라도, 전화기를 넘겨받는 순간 멘붕이 되는 나에겐 뇌를 풀가동해서 넘겨야 하는 '위기'의 순간이다. 앞뒤 맥락 없이 '아하하하하 날씨가 좋을 거라더니 예보와는 다르게 별로네요'라는 날씨 이야기로 겨우 대화를 이어가 본다.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수영장에 갔는데, 어머니께서 친구분을 만나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시다가 갑자기 내게, 탈의할 동안 메리(친구분 성함)와 얘기하고 있으라며 탈의실로 향하셨다. 메리는 어머니보다 연세가 훨씬 많지만 전직 군인이셨고 은퇴 후에도 꾸준히 운동을 하고 계셔서 꼿꼿하고 핏 한 체격을 갖고 계신다. 메리의 연세를 처음 듣고 충격받았던 때를 번뜩 떠올리며 그녀가 얼마나 젊어 보이는 지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녀의 강한 엑센트를 따라가기도 바쁘고 다음 질문은 어떡하지, 어떤 표정으로 반응하지 등등 대화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하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렇게 모면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진다. 아, 어머니, 저 언제쯤 괜찮아질까요... 저도 어머님처럼 즐겁게 사교적이고 싶습니다!
어머님댁 썬룸(conservatory라고 부르는 유리로 된 온실역할을 하는 방)에 앉으면 뒷마당 뒤로 양과 젖소를 키우는 농장이 보인다. 오늘은 봄을 맞아 어미양들이 얼마 전 출산한 아기양들을 데리고 나와 마음껏 풀을 뜯으며 햇살을 즐기고 있다. 썬룸에 앉아 차를 마시던 어머니와 나는 한 아기양 몸에 플라스틱 봉지처럼 보이는 띠가 둘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즉시 수화기를 드시는 어머니. 양 주인에게 전화를 거신다. 아기양 상태를 알려주시자 농장 주인 마크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 양들은 뭐든지 먹어치우는데 어린양이 플라스틱을 잘못 삼켜 탈이 나거나 죽으면 안 되잖니, 하시며 나를 보고 생긋 웃으시는 어머니. 순간, 농장 주인까지 바꿔주시면 어쩌나 그 걱정만 하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져 귀가 빨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