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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Jan 20. 2024

양말을 뒤집어 놓는 남편

한겨울에 결혼한 우리 부부는 따뜻한 계절이 올 때까지 신혼여행을 미루자고 합의했다. 유럽 3개국을 돌며 2주 정도 여행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신혼 3개월 차, 덜컥 아이가 들어섰다. 신혼여행을 계획한 6월 중순이면 임신 4개월 차임을 감안해, 힘들이지 않고 최대한 느긋하게 여러 나라를 둘러볼 수 있는 지중해 크루즈로 계획을 선회했다. 그렇게 2014년 초여름의 시작, 12일간에 걸쳐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의 여러 항구를 도는 지중해 크루즈에 올랐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크루즈 패키지도 있다. 디즈니를 테마로 루프탑에 워터파크를 방불케 하는 롱 슬라이드와 어린이 편의 시설(하루에 서너 시간씩 수업을 하며 아이들을 봐주는 데이케어, 올데이 무제한 화덕 피자, 어린이들을 위한 스테이지쇼 등)들을 갖춘 패밀리 크루즈들. 하지만, 우리가 탔던 배는 노년 부부들 위주의 조용한 노선이었다. 아침과 점심은 뷔페 형식이지만, 저녁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포멀 양식당에서 코스요리를 먹는다. 식사 후에는 밤마다 극장에서 서커스, 카바레, 뮤지컬, 스탠딩코미디 등등 여러 종류의 쇼가 펼쳐친다. 낮동안에는 루프탑 수영장에서 수영이나 태닝을 하고, 항구에 도착하면 대여섯 시간씩 정박한 도시를 둘러보는 excursion 활동을 할 수 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지만, 짐을 싸고 푸는 수고가 없다는 점, 삼시 세끼가 훌륭한 퀄리티로 제공되므로 항상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 하루에 두 번씩 방을 청소해 주기 때문에 정리정돈의 스트레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점 등, 크루즈의 장점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래서인지 배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승선한 지 이틀째, 저녁식사를 위해 자리를 안내받고 예쁜 생화가 데코레이션 된 테이블에 앉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 먼저 앉아 계셨던 중년의 부부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우리가 메뉴를 고르고 주문을 하자, 옆 테이블의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신혼부부처럼 보인다, 는 말로 시작해 어디서 왔는지 직업은 뭔지,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등 꽤나 구체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녀는 화려한 스팽글이 잔뜩 달린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프레세코(이탈리아의 스파클링 와인, 식전주로 많이 마심)를 계속 들이키며 한껏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 너무 아름다운 밤이죠? 이렇게 아름다운 밤, 젊은 커플과 나란히 앉아 이 분위기를 즐기며 훌륭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니.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자신의 남편)도 오늘따라 더욱 멋져 보이네요. 나와 이이는 신혼 초 서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난 퀘벡에서 나고 자라 불어밖에 못했고, 이 사람은 미국인이라 영어 말고 다른 언어는 전혀 할 줄 몰랐거든요. 서로의 말을 몰라 신혼 초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살아온 방식도 너무 달랐고. 양말을 계속 뒤집어 빨래통에 넣어서 그 일로 몇 달을 싸우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행복한데. 가만히 보면 커플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목숨을 걸고 싸워요.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여러분도 사소한 이슈들에 집중하지 말고, '내가 앞에 있는 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해서 결혼했는지'만 생각하세요. 그럼 삶의 고비들을 잘 넘기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비록 술과 기분에 취해 길게 이어진 연설이었지만, 그녀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기분에 취해 있었으니까. 심각한 허니문 스테이지(눈이 멀고 남의 말이 안 들리는 상태)를 겪고 있던 내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속에 들어와 콕콕 박혔다. 그래 맞아,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떤 문제도 있을 리 없지,라고 생각하며.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승선한 배에서 그 부부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긴 여정의 끝에서 우린 그들을 다시 마주했다. 저녁을 먹고 쇼를 보러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들이 먼저 타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때와는 다르게 어색하고 냉랭한 기운이 그들 주위를 감쌌다. 서로 짧게 안부를 묻고 여행을 즐기고 있는지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다 같이 내렸는데, 우리와 거리를 두고 뒤에서 걸어오던 그들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보니, 그녀가 저녁 식사 때 걸치려고 침대 위에 올려 둔 스카프 위에 남편이 자신의 양복 재킷을 포개 놓으며, 그들은 그 잃어버린(?) 스카프를 찾느라 삼십 분 넘는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저녁 식사에도 늦었고, 서로 원망하느라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저녁 식사를 완전히 망쳐버린 것이다. 아...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쓰지 말라던 그녀의 명랑한 조언이 뇌리를 스친다. 그녀를 붙들고, '아니, 그런 사소한 문제로 이 아름다운 저녁 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리실 거예요?'라고 묻고 싶은 걸 참는다.


자신도 지킬 수 없었던 조언을 술에 취해 하던 그녀. 그래도 그녀의 말이 옳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삶의 고비, 까지는 아니지만 나와 너무나 다른 남편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사랑만으로는 안될 것 같다고 느꼈던 순간들도 분명히 있었다. 반복적인 요구에도 변함없이 일어나던 일들을 지켜보며 좌절했고, 내 의견이 무시된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그런 순간들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나를 일부러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니라고 상대를 믿으며 기다렸고, 사소한 것들로 트집을 잡거나 사랑을 의심하며 상대를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남편은 양말을 뒤집어 놓는다. 손가락이 삔 게 아닌데 왜 양말 끝에서 쭉 잡아당겨 바로 벗지를 못하는 걸까. 혹여 양말 목부터 벗어 뒤집어졌다고 해도 다시 뒤집는데 일초도 안 걸리는 일을 왜 못하는 걸까. 부글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길 수십 번, 어느 순간, '나에게 당연한 일이라고 해서, 남편 역시 아무 고통 없이 해낼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그의 행동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내 말을 무시해서 그가 양말을 뒤집어 놓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사랑하는 남편은, 양말을 제대로 해 놓는데 쓰는 에너지를 아껴 다른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 준다. 그럼 나도, 그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해 내며 그의 표현에 박자를 맞춘다.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해하려고 억지로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서로 믿고 기다려주는 과정을 함께 함으로써 관계가 더욱 견고해지기 한다.


죽을 때까지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그가 가진 몇 가지 습관들이 떠올라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 모두 사소한 것들,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지는 않을 미미한 것들이므로 오늘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 저편으로 넘겨버린다. 내 기분은 내가 선택하는 것, 양말 따위가 내 기분을 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오늘도 예외 없이 모조리 뒤집혀 있는 양말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굳은 의지를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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