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의장대 출신인 친정아버지께는 오십 년지기 군대 동기들이 몇 분 계신다. 의장대 특성상 모두 180이 넘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소유하고 계셔서 서너 분만 모여 함께 움직여도 그 위세가 대단하다. 내가 대학생이던 20여 년 전만 해도 그들의 객기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딸만 둘인 우리 집을 제외하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아들 둘씩을 두고 계셨는데, 부산에서 군동기 모임이 있으면 모든 이가 아내와 자식까지 대동했으므로 총 모임 인원이 열대여섯 명에 이르기도 했다. 덩치가 산만한 아저씨 넷은 나이 오십에 다 함께 소주를 몇십 병씩 들이켠 후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해운대 바다로 뛰어들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아들들이 함께 뛰어들어 그들을 건져내었다.
그 아들들 중에 나와 동갑인 T 가 있었다. 쇠젓가락으로 이를 쑤실 정도로 호기로우신 B 아저씨의 둘째 아들이었다.
B 아저씨는 바람을 피우다 걸리기를 밥먹듯이 하는 사람이었는데, 심지어 나도 어릴 때 (B 아저씨 부인의 병문안을 갔다가) 내연녀 중 한 명을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숨기지 않는 외도를 하셨다. 아버지를 혐오하면서도 따르는 T 가 가엽기도 불안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해병대에 지원한 T 가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소에 있던 그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얼마나 편지 쓸 사람이 없었으면 내게 보냈을까, 싶은 마음도 잠시, 봉투에 쓰인 괴발개발의 글씨가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난, 맞아가며 글씨를 배웠다. 국민(초등) 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당신의 기준에 맞는 글씨를 써낼 때까지 아이들을 괴롭혔다. 단체로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허벅지에 회초리를 맞기도 했다. 글씨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 반 아이들 모두는 궁서체를 마스터한 상태로 5학년이 되었다. 이후 학창 시절 내내 난, 글씨 잘 쓰는 애, 로 불렸다. 내게 판서를 부탁한 선생님들도 많으셨고, 공문서나 교실 내 게시판 작성도 도맡아 했다. 그런 내 눈에 비뚤거리는 그의 문장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통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눈에 힘을 준채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글씨가 문제가 아니다... 뭔가 많이 잘못됐다...
'휴가 나가서 니를 만날수 잇쓰면 좃겠써'
이게 뭐지? 나랑 이 정도로 심하게 농담할 사이는 아닌데. 눈으로 읽어 내려가면서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두세 줄을 더 읽다 편지를 떨어뜨리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떡하지. 편지를 읽던 언니가 입틀막을 한 상태로 얼어있자, 동생이 다가와 떨어진 편지지를 주워 들었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바닥에 나뒹굴며 박장대소를 하는 그녀를 보고 도망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답장은 써야겠지?
편지의 내용이 어땠는지, 무슨 정신으로 답장을 썼는지 자세한 기억이 없다. 이후 두세 번 더 편지를 주고받은 것 같은 흐릿한 기억만 있을 뿐이다. 친구라기엔 애매한 관계, 아버지들 말고는 우리 사이를 지탱해 줄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었기에, 마치 틀린 맞춤법 때문에 끝이 난 관계 같은 착각이 든다. 당시 이화이언(다니던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익명게시판에서, 남자친구가 목도리를 목돌이라고 쓴 걸 보고 정이 떨어져 이별을 고민하고 있다는 한 재학생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 나도 그런 사람인 건가.
하지만, 남편을 만나 연애하며, 내가 맞춤법에 예민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맞춤법을 틀린다고 헤어짐을 고려하는 사람은 아닌 게 확실했다. 경미한 난독증이 있어 철자를 제대로 못쓰는 남편을 사랑하게 됐지만, 그가 난독증을 고백하기 전에도 스펠링을 늘 틀리는 그를 달리 본 적은 없었다. 물론, 엉망진창인 문자를 보내놓고 본인의 엄지가 두꺼워 계속 오타가 난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 그가 웃겨서, 그 모든 오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맞춤법을 틀려도 그게 남편이어서 괜찮았던 건지, 아님 내가 생각보다 예민하지 않았던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결국 이렇게 결혼해 잘 사는 걸로 보아 그렇게 큰 난관? 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어머니께서 보내시는 WhatsApp 메시지는 틀린 스펠링으로 가득하다. 어머님의 맞춤법 실수를 차마 눈뜨고 보실 수 없었던 아버님은 가족 채팅방에서 오래전 스스로 퇴장하셨다. 난독증이 심한 어머님은 오타를 자동으로 수정해 주는 기능을 쓰고 계시지만 스펠링이 완벽한 문장을 보내시는 일이 극히 드물다. 아버님은 대학교수들로부터 의뢰받으실 정도로 논문 편집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인데, 그렇게 깐깐하신 분이 어머님의 오타 천지 메시지를 거북해하시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대화 중이든 텍스팅 중이든 틀린 맞춤법이나 문법적 실수를 하는 사람에게 꼭 대놓고 지적해 주시는 아버님께,
"아, 중요한 게 아니면 내 말을 끊지 말아 줄래요?"
라고 어머님이 당당히 요구하신다.
우리말을 사랑하고 지키고 보전해야 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분위기를 어색하게 할 만큼 실수하는 사람들에게 면박을 주거나 심지어 관계를 단절하기까지 하는 건 옳지 않아 보인다. 틀린 맞춤법 때문에 정이 떨어졌는데, 단지 그 이유로 헤어지는 건 야박한 것 같아 관계를 질질 끌고 가는 것 또한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정말 맞춤법 때문인 걸까? 이미 식어가는 마음에 그저 빌미가 된 건 아닐까.
할머니에서 아빠로 이어져 내려오는 난독증의 가족력. 아들은 다행히 책을 읽는데 어려움은 없는데, writing을 힘들어한다. 수용(음운인식) 능력에 문제가 없으므로 완전한 표음문자인 한글을 읽고 쓰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영어 스펠링에는 고전하고 있어 아이와 매일 조금씩 철자 연습을 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반복적으로. 아직 먼 미래지만, 맞춤법을 틀려 영문도 모른 채 이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아들에게 도움을 주고픈 엄마의 노파심이 발동했다면 너무 앞서가는 것이려나.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보자, 아들. 이왕이면 맞춤법 안 틀리는 남자로 크도록 엄마가 도와줄게.
*사진 출처, Publication co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