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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Apr 13. 2024

질문이 많은 남자

영국 시간으로 2024년 4월 8일 저녁 7시 40분, 미국 대륙에서 개기 일식이 예고됐다. 라이브 방송으로 개기일식의 전 과정을 지켜보던 남편이, '영국에서도 10퍼센트 정도는 볼 수 있다고 하던데, Deganwy beach(집에서 5분 거리의 바닷가)로 나가볼까?' 제안했다. 말이 10퍼센트지,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해도 안 보이는데, 일식을 볼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낙관적인 남편과 아들은 이미 집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남편의 질문,

"여보, 이 재킷을 입고 나가도 괜찮을까? 추우면 어떡하지? 얇은걸 두 겹 입고 위에 방수재킷을 입을까, 아님 제일 따뜻한 재킷 하나만 입을까? 지금 온도랑 풍속이 어떤지 혹시 알아?"

거기에 더해지는 아이의 질문,

"엄마, 이 바지 방수 맞아? 이모가 사준 재킷 하나만 입고 가도 안 춥겠지? 내 방수재킷 혹시 차에 있어? 내 전화기 가져가서 사진 찍을까 아님 할아버지 카메라 가져갈까?"


순간, 십 분만이라도 질문 좀 그만 받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엔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그가 흥미로웠다(그러니 질문하는 그는 변하지 않았고, 질문을 힘들어하는 내가 변한 것이다). 그는 내 의견을 항상 궁금해했고, 나는 그걸 나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라고 생각했다. 질문을 반가워하지 않는 환경에서 큰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질문이 많이 오고 가는 대화가 재밌고 자유롭다느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집에서는 부모님이 딱 한 번 말씀하시면 토를 달지 않고 따랐어야 했고, 학교에서도 질문은 버릇없는 행위로 간주되어 궁금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들이 생겨도 대충 눈치로 해결하거나 꿀꺽 삼키는 의문들이 많았다. 몰라서 질문을 하면, 너는 그런 것도 모르냐며 무시당하는 가정환경에서 크다 보니 아빠보다 많이 알고 싶어서 매일 신문을 읽고 상식백과 같은 책들을 다독했다.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을 귀찮아하거나 화를 내며 자리를 뜨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기에, 나는, 커서 누가 뭔가를 물어보면 차근차근 친절하게 가르쳐줘야지 다짐하곤 했었. 중학교 2학년 때, 모래주머니를 어딘가로 옮기라는 체육 선생님의 지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여기로 옮기라고요?'라고 되물었다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검은색 결재서류판 같은 클립보드 얼굴을 수차례 맞았다.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선생님은,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 세 명도 나란히 세워놓고 멍청하게 지시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냐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질문은 너무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어 갔고, 점점 덜하다가 안 하게 되었다. 질문을 하지 않아도 사는데 불편함이 없었고, 오히려 재앙을 피해 갈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처음 시댁에 인사드리러 간 날, 거의 인터뷰에 가까운 Q&A 시간이 이어졌다.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니까, 그의 부모님도 내가 궁금하시겠지,라는 생각으로 모든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나를 잘 알게 되셨다고 해서 질문이 멈추지 않는다는 걸 그땐 몰랐다. 나에 대한 정보는 다 알게 되셨지만, 그날그날 나의 기분,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대할 때 내가 갖는 생각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계속해서 질문거리가 생겨났다. 나에 대한 질문만 하시는 것도 아니다. 어머님께서 당신의 친구분을 초대하시는 일에 대해서 생각을 물으시고, 아버님께서는 방에 커튼을 새로 바꾸시면서도 내 의견을 듣고 싶어 하신다. 그렇게 수많은 질문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느 누구도 화내지 않고 오가는 환경에서 컸기 때문인지, 남편도 질문이 많다. 시댁 식구들과 있으면, 모두 질문만 하지 정확한 대답을 하거나 또렷한 의견을 내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흠칫 놀라곤 한다.


연애할 때, 남편이 자신의 과거 연애사를 언급한 적이 있다. 대부분 남편이 먼저 이별을 고했는데, 딱 한 번 여자친구가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던 경우가 있었다. 삼 개월 정도 만났고 별문제 없이 순탄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의 이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넌 질문이 너무 많아."

십 년째 질문 폭탄 속에 살다 보니, 가끔은 '이러다 귀에서 피 나오겠는데?'라는 생각도 하다 보니, 그 여자의 마음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다만 그녀는 남편을 그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던 거겠지. 나는, 귀에서 피가 나오는 한이 있어도 이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거고.


남편이 질문을 쏟아낼 때, 자는 척도 해 보았다. 말이 너무 많고, 셀 수 없는 질문이 사이사이 섞여 있고, 중간중간 아이의 질문도 추가되어, 감당하기 힘든 피곤이 몰려와 그냥 눈 딱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눈을 감은 나를 보고 잠이 들었다고 생각한 남편은, 계속해서 아이와 대화를 이어 나가다가 (질문 고비가 지나갔나 싶어 안심하고) 눈을 뜬 나를 보자 같은 질문들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아,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나는구나. 눈감고 듣고, 눈뜨고 또 듣느니, 그냥 한 번만 듣자,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경험이었다.


질문을 많이 하는 남편은 다른 사람의 질문을 굉장히 반가워한다. 특히 아이가 질문을 하면,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보다 눈이 더 초롱초롱 해 져서는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대답을 해 주고, 혹시 모르면 'Okay Google'로 묻거나 아이와 함께 책을 찾아본다. 아이와 어떤 활동을 하든 활동의 끝에는 항상 질문들이 이어지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기분이 어땠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구체적인 대답을 듣길 원한다. 나와 함께 영화를 봐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질문 지옥이 시작되는데, 내 대답을 다 들으면 '나한테는 안 물어봐?'라고 질문하며 스스로 대답할 준비를 한다.


다행히 그의 대답은 대부분 흥미롭고 재밌고 철학적이다. 그의 생각을 알면 알 수록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고, 내 선택이 옳았다는 기쁨이 몰려온다. 남편이 아이에게 하는 질문들은, 나도 궁금했지만 아이를 배려하는 마음에 하지 않고 있었던 것들이 대부분이므로 나 역시 대답을 함께 경청하는데, 그렇게 아이의 생각을 알아가는 재미 또한 특별하다. 평소에는 굳이 하지 않던 주제나 범위의 이야기들을 취미 활동이나 같이 본 영화를 통해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가. 그런 기회들을 통해 듣는 아이의 생각들은 매 번 부쩍 자라나 있어서 놀랍고 신기하다. 이 경험을 놓치지 않도록 질문을 하고 또 하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질문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크다 보니, 아이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어른에게 질문하는 데 두려움이 전혀 없다. 그래서,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다. 혼자 끙끙 앓는 시간이 적어 스트레스가 낮고, 모르면 질문하여 답을 구할 수 있으므로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 자신이 그런 방식으로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재빨리 손을 내밀어 잡아준다. 아빠에게 배운 대로, 그들의 기분을 물어봐 주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질문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려 노력한다. 그래, 아이를 키우는 환경은, 이게 옳다. 내가 질문에 익숙하지 않고, 질문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옳은 걸 부정할 순 없다.


저녁 식사 후 새 보존구역에 산책 갔다가 돌아와 후식을 먹기 위해 딸기와 라즈베리를 씻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늘 곁들여 먹는 그릭요거트가 없었. 남편에게 사다 달라고 부탁하자 벗었던 외투를 주섬주섬 다시 입으며 그가 아이에게 말한다.

"아들, 아빠랑 같이 테스코 갔다 오자."

"혼자 갔다 오면 안 돼?"

"같이 가자."

"왜?"

"외로워서."

(질문할 사람이 없어 심심한 거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자 아들이,

"오케이, 아빠가 외로우면 안 되니까."

라며 현관으로 향한다. 두 남자 모두 행복한 얼굴로 '안녕'을 외치고 집을 나선다.


이제 적어도 삼십 분 간은 고요하겠구나.




*대문사진, 남편의 질문 폭탄에 대한 나의 반응, 출처 hannah의 카카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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