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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Mar 30. 2024

영국에서 이 한국인의 인기는

지속될 수 있을까

최근 한 달 동안 아들이 유독 같은 반 여자친구들 이야기를 자주 했다. 어릴 때부터 이성에 관심이 많았고 학창 시절 본인이 인기남이었다며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남편에게는, 아이가 어떤 학업 성취를 이루고 있는지 보다 이성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젓고 있는 나를 두고 이어지는 둘의 대화는 보통 다음과 같다.

"아빠, 오늘 할리가 갑자기 나한테 이 장난감을 줬어."

누가 봐도 버린 게 아닐까 싶은 푸시팝 열쇠고리를 자랑스럽게 흔들며 아들이 아빠에게 말하자,

"그래? 할리가 그걸 왜 줬을까? 너의 어떤 면이 마음에 들었을까? 할리는 다른 아이들한테도 뭘 잘 주니?"

라는 폭풍 질문이 쏟아진다. 표정을 보니, 남편은 이미 할리가 아들을 좋아한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또 어떤 날은, 아들이,

"아빠, 오늘 이자벨라가 윌로에게, 나한테 뽀뽀하라고 말했대. 그래서 윌로가 내 볼에 뽀뽀했어."

라고 하면, 남편은,

"그래? 평소 이자벨라나 윌로가 너를 좋아했니? 걔들이 서로 네 얘기를 하는 건가? 그래서 네 기분은 어땠는데? 윌로에게 뭐라고 했어?"

라며 상황에 과몰입하여 아들의 의견을 캐묻고 여자아이들의 생각을 가늠해 보고자 애쓴다. 그저께 저녁엔 밥 먹던 아들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난 듯,

"참, 오늘 세 명이 내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어. 두 명은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고(응? 이건 또 무슨 말?) 로티는 에너미인 줄 알았는데, 날 좋아했다네."

라고 말하자 남편이 반색을 하며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꼬치꼬치 묻는다. 기억력이 나쁜 아들이 자세히 기억하진 못하자 급 실망하며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그 친구들이 뭐라고 했는지 세세하게 기억하라고 조언하는 남편.


같은 반 아이 25명 중에서 유일한 다크브라운 헤어와 아이컬러를 가진 아들은, 한국인이기도 하고 영국인이기도 하다. 아들의 눈은 아몬드 모양으로 영국 아이들과 확연히 다르고, 색도 보기 드문 어두운 컬러라 이국적인 느낌을 풍긴다. 아빠가 영국인이지만 강한 로컬 엑센트가 없어서 아들 역시 그렇기 때문에, 어느 지역 출신인지 가늠이 안되어, 처음 전학 왔을 때 아이들은 우리가 사실 미국에서 온 건 아닌지 묻기도 했었다. 영어를 쓰지만 미지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은 다른 생김새와 억양을 가진 아들을 보며 아이들은 흥미로워했다. 반에서 제일 큰 키, 이미 한국에서부터 수영, 태권도, 싸이클링으로 다져진 단단한 체구도 아이를 비범해 보이게 만들었다.


아들은 태어났을 때도 키가 커서, 아이를 받던 인도인 여의사가 깜짝 놀랐다. 58cm의 키로 태어나 또래보다 항상 월등히 컸고, 검진을 받으면 결과는 늘 그래프를 벗어나 맨 위쪽에 점으로 위치했다. 네다섯 살 쯤엔 스쿠터를 타고 공원을 향하던 아들을 불러 세워 지나가던 아주머니께서 길을 물어보신 적도 있다. 초등학생 정도 돼 보인 아이가 어버버버 하자 놀란 아주머니께서는 멈칫하시더니 성급히 발길을 돌리시려고 했다. 뒤따라 뛰어오고 있던 내가 아주머니께서 찾고 계시던 지하철역을 알려드리고 아이의 나이도 말씀드리자 깔깔깔 웃으셨다. 나이가 많아 보여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지만 기대가 충족된 적은 없었다. 인지와 신체의 부조화. 나는 늘 그 갭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키가 큰 아이를 가진 어미 비애랄까. 지금도 아들은 반에서 가장 작은 친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한 학년 높은 아이들과 어울려 놀아도 신체적으로(만)는 전혀 어색함이 없다.


키가 크기 때문인지 아들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의젓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장난기 많고 슬랩스틱을 좋아하는 아들은, 말을 섞는 순간 호감이 반감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웃긴 표정을 짓고 몸개그를 하며 다른 아이들을 웃기고 싶어 한다. 한 번 웃기는 데 성공하면 모두가 질릴 때까지 같은 개그를 반복한다. 전부 집에서 아빠로부터 배운 것들이라, 하지 말라고 해도 '왜?'라는 반문이 돌아올 시, 내가 할 말이 없으므로 말리지 않는다. 남편이 황당한 개그를 시전 할 경우, 나는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기 때문에, 자칫 자가당착에 빠져 아이에게 궤변을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래,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저번주에 저녁을 먹으며 아들이,

"아빠, 프레야가 그러는데, 한국인들은 전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춘대. 그러면서 나한테 노래 하나 불러달랬어."

불길하다 불길해... 불안을 숨기고 남편과 나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서 어떻게 했어?"

"한 곡 불러줬지."

"그랬더니?"

"프레야가 귀를 막던데?"

아... 결국 일이 터졌구나. 난 속으로 아들이 얼마나 민망했을까 걱정했고, 남편은 박장대소했다. '아니, 아무리 듣기 싫어도 그렇지... 걔는, 노래를 시켜 놓고 왜 귀를 막아...' 혼자 속으로 투덜대는데, 남편이 아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했어?"

"멈췄지."

"기분은 어땠어?"

"좋았어, 오늘따라 노래가 괜찮게 나왔거든."

아... 앞에 대놓고 귀를 막아도 넌 괜찮았구나. 그래, 그럼 됐다. 남편은 웃다가 눈물까지 흘렸다. 아빠 엄마가 너무 웃자, 아들도 뭐가 웃기는지 모른 채 같이 웃었다. 노래를 잘하고 싶으면 엄마가 보컬 레슨 알아봐 줄게, 아들.


어제 하교하며 아들은 수학시간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었다. 아들은 한국의 또래 친구들에 비해 수학이 현저히 뒤처지지만, 선행 학습이 전혀 없고 진도가 느린 영국에서 수업받다 보니 어느새 '수학 잘하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반 친구들도 어디서 들었는지 아들에게, '넌 한국에서 왔으니 수학 잘하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아직까지는 그 명성을 겨우 이어오고 있는 아들. 그런데 어제 수업에서 Mr. Davies  큰 단위의 숫자로 나눗셈 문제를 내주시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8892 ÷ 342 (답은 26)

집에서 나와 함께 세 자릿수 나눗셈을 해본 적 있던 아들은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나 저거 아는데'하는 표정으로 옆에 앉은 아이들에게 아는 척을 마구 했다고 한다. 그러자 데이비스 선생님께서 아들에게 답을 말해보라고 했고, 아들은 24라고 틀린 답을 말했다. 격려와 내적 동기화가 교육의 주요 방향인 영국의 학교 현장에서, 틀린 답을 말한 아이가 실망하거나 좌절할까 봐, 

"거의 맞았어, 잘했어"

라고 칭찬해 주신 선생님. 아들을 기죽이긴 싫었지만, 그 실력으로 어디 가서 잘난 척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수학은 정확성이 중요해. 얼마의 차이가 나든 정답이 아닌 건 틀린 거거든."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 알아, 오늘은 틀렸는데 다음엔 맞힐 수 있을 것 같아."

라며 초긍정의 답으로 응수한다. 엄마보다 선생님 말씀이 더 영향력 있는 케이스, 다행인 건가.


아이에게 굿나잇 인사를 하고 남편과 새로 시작한 넷플릭스 시리즈 '3 Body Problem' 보기 위해 거실로 내려왔다. 인트로를 보며 잠시 딴생각에 잠긴 듯했던 남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애가 너무 인기가 많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냥 놔둬도 괜찮을 것 같아. 알아서 균형을 맞춰가네. "

(본인을 닮아서) 인기가 많을까 봐 걱정했단 말도 황당한데, 그냥 놔둬서 될  아니었다면 과연 어떤 계획이 있었을지도 궁금하고, 저렇게 이미지를 깎아먹으며 균형을 맞춰가는 게 맞는 건가, 저러다 결국 모자란 애로 보이면 어쩌나 싶기도 해 걱정스럽다.


한국인의 인기는 빠르면 올해, 늦어도 내년 안엔 사그라들 것 같다. 아니, 영영 사라져 버릴지도. 다만 너무 드라마틱한 하강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아들은 괜찮을 것 같지만, 남편에게 타격이 있을지도 모르겠기에. 근데, 아들, 개그욕심 좀 버리고 웬만하면 쿨한 한국인의 모습으로 남아주면 안 되겠니?




* 아이와 행복한 이스터브레이크 보내고 4월 13일에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 _)(^o^)

** 대문 사진, 아빠와 아들 Aber falls(North Wales)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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