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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Mar 23. 2024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앞집여자 캐롤라인

내가 사는 주택 단지에는 2 베드룸 플랏부터 4 베드룸 하우스까지 다양한 종류의 주거 형태가 섞여있다. 보통 30년에서 50년, 동네에 따라 100년도 더 된 건물들이 모여있는 단지들에 비하면 지어진 지 15년밖에 안된, 비교적 신축에 속하는 다. 그렇다 보니, 주거 연령층도 낮아 우리처럼 아이와 사는 젊은 혹은 중년 부부 중심의 가족들이 대부분이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단지 내 공터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던 서너 명의 남자아이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아이가 앞집 여자 캐롤라인의 아들, 올리였다.


올리는 틈만 나면 우리 집 초인종을 눌러 아들에게 같이 놀자고 조른다. 아들보다 두 살 어리지만, 네 남매 중 셋째여서 사회성이 좋고 나이에 비해 성숙한 편이라 어울려 노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자기 집으로 아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단지 내 공터에서 함께 공놀이를 하거나, 우리 집에 놀러 와 뒷마당에서 아들과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리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올리에겐 누나 둘과 여동생 명이 있다. 누나들은 둘 다 중학생인데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다니지만, 머리색도 다르고 생김새가 전혀 달라 자매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키도 별 차이가 없어 누가 언니인지 동생인지 헷갈린다. 그 집에 놀러 갔다 온 아들에 따르면 누나들은 모두 남자 친구들이 있어 어떤 때는 집안에 일곱 명의 아이들(누나 둘, 누나들의 남자친구들, 올리, 내 아들, 올리 여동생)이 북적일 때도 있다고 한다. 그 혼잡함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지만, 우리 집에 일곱 명이 온 게 아니니 상상은 거기까지 한다.


어느 주말 오후, 모처럼 비예보가 없어 도시락을 챙겨 가까운 곳으로 소풍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캐롤라인이 검은색 지프를 타고 온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반갑게 인사하며, 이야기 나누던 남자를 올리의 아빠라고 소개해 준다. 올리는 이미 아빠 차 뒷좌석에 타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아이 넷을 데리고 사는 싱글맘인데, 주말마다 아이들의 아빠들이 와서 각자의 아이들을 데려가 시간을 보낸다. Year 9인 제일 큰 아이의 아빠는 뒷모습만 본 적이 있고, 나머지 세 아이의 아빠들은 각각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모두 하나같이 저세상 쿨함으로 헤어진 전 부인과 친구처럼 잘 지낸다. 주말이 되면 아이들과 보낼 시간을 기대하는 듯 환한 미소를 띠고 앞집 앞으로 찾아온다.


아빠가 각각 다른 캐롤라인의 네 아이들. 큰 아이 두 명은 (다른 십 대 아이들과 다르게) 마주치는 이웃들과 늘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올리 역시 귀엽고 예의가 바르며,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막내는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항상 해피하다. 가끔 앞마당을 향해 창문을 열어두면 까르르 웃는 아이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올리는 자신의 아빠와는 말할 것도 없고, 누나들의 아빠들과도 잘 지내며 여동생의 아빠도 좋아한다고 한다. 막내 때문에 휴직 중인 캐롤라인은 일은 안 하지만 공사다망한데, 어떨 때는 아빠들 중 한 명에게 어린아이 둘을 맡기고 자신의 일을 보기도 한다. 이것은 정녕 듣도 보도 못한 의리의 육아공동체. 어떤 사정으로 이혼을 한 건지, 아니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 중 아이들을 낳은 건지 자세한 그들의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헤어지고 나서도 이렇게 서로를 위하며 책임을 다하는 보기 좋은 관계라니.


한국에 살던 시절, 남편이 일하던 대학에서 제공해 준 아파트에 살았다. 같은 건물에 살던 미국인 교수와 일본인 아내가 있었는데, 그 집 큰 아들이 내 아이와 친구가 되어 플레이데이트를 자주 가졌다. 일본인인 미코는 미국에서 통번역대학원을 나와 넷플릭스 번역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디지털노마드였다. 아들을 둘 키우면서, 일도 하고, 깔끔하게 정리정돈된 집에서 살던 미코. 나도 저런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완벽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려 깊고 마음이 따뜻하며 유머러스해 그녀와 함께 있으면 그저 유쾌하고 즐거웠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달랐다. 재미없는 말을 쉴 새 없이 늘어놓는 건 둘째 치고, 그의 말을 곰곰이 되새김질 보면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자꾸만 들었다. 가치관의 차이인가, 내가 아는 상식과 윤리가 통하지 않는 듯한 다른 세상 이야기, '나만 잘 살면 돼' 같은 말을 일말의 주저 없이 입 밖으로 내뱉는 교양 없음이 문제였던가. 확실한 물증 없이 찝찝하게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 계속됐지만, 아들끼리 아내끼리 친구여서 가족단위의 모임은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의 말이 나의 철학에 반한다고 해서 그를 내치기에는, 너무 남이어서 멀어질 가까움조차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2018년 봄, 어느 주말을 앞두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대여섯 가족이 큰 소풍을 준비했다. 간단한 음식들을 싸와 잔디밭에서 아이들을 놀리고 어른들끼리 오랜만에 근황토크를 할 계획이었다. 그날따라 큰 아들을 데리고 일어수업 보강을 다녀온 미코는 서울 시내 주말 교통 체증에 발이 묶여 삼십 분 정도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허겁지겁 도착해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며 남편의 눈치를 보던 그녀는, 목이 는지 남편이 챙겨 온 것 같은 아이스박스를 열어 시원한 맥주를 꺼내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That's mine(그건 내건데)."

캔 맥주를 딱 하나만 챙겨 온 그녀의 남편. 실망한 듯 미코가, '그럼 나는?'이라고 묻자,

"Who cares(알 게 뭐야, 누가 신경 써)?"

란 답이 돌아왔다.


하필 아이스박스 옆에 서 있다가 그들의 대화를 들어버린 나는 미코가 민망해할까 봐, 차마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체 그녀에게 오렌지 주스 한 병을 건넸다. 같이 서 있던 인도인 친구가 미코의 팔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자리를 피했다. 모두가 당황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들의 엄마이자 아내인 사람에게 who cares 라니, 그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싶은 마음에 눈에 쌍심지를 켜고 피크닉 내내 미코의 남편을 째려보았지만, 내 눈만 아프고 간혹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다른 이들을 놀라게만 했지, 미코의 남편에겐 그 어떤 분노의 에너지도 가 닿지 않았다.


난 그 뒤로 미코의 남편을 보기가 불편해졌다. 나한테 한 말도 아닌데, 부부끼리 어떤 사정이 있든 그건 그들의 문제인데. 하지만, 그녀의 남편을 마주칠 때마다, 누가 그의 머리 위로 'Who cares?'라고 쓴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것처럼 눈앞글씨가 떠다니고 신경이 곤두섰다. 저, 저, 인정머리 없는...


부부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마음을 하나의 울타리 안에 쓸어 담고 사는 공동체이다. 단지 너와 나 둘 뿐인데,  관계 안에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경험하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러 겹의, 다양한 깊이의, 수많은 형태의 감정들을 겪는다. 분노와 슬픔, 좌절과 의심, 원망과 질투, 무관심을 가장한 실망, 자존심을 먼저 내세우는 유치함, 이 모든 부정적이고 복잡한 심정이 들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상대를 향해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감정이 Who cares이다. 


마음 써야지, 배우자인 그(녀)가 힘들다는데, 아프다는데, 목이 마르다는데. 힘듦을, 아픔을, 갈증을 해결해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알아달라고, 모른 척하지 말라고. 그러니, You should care.


남자든 여자든, 같이 살면서 나의 안위에 관심이 없는 배우자가 있다면, 그건 희망이 없는 관계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떤 법적인 이유에서 헤어지지 않고 살아갈 순 있겠지만, 배우자로서의 자격은 없다고 본다. 시간이 지나 남녀사이의 로맨스는 다해도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필요하고, 그들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부모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또한 져야 한다. 캐롤라인과 네 명의 (전) 남편처럼 헤어진 후에도 케어하면서 평안과 안녕을 위해 공생하는 관계를 지켜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다. 한 때 친구라고 생각한 사람의 배우자가 인간적으로 너무나 실망스러워 몸서리쳐야 했던 기억을 통해, 사랑이란 허울을 뒤집어쓰고 살지만, 의리나 인정이 없다면 관계에 어떤 의미가 남을지 고민해 본다.




*캐롤라인, 올리, 미코는 가명입니다.

**대문사진, 원앙,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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