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생활에 적응하면서 아들은 플레이데이트에 자주 초대되었다. 같은 학년에 4 총사( 4 musketeers)라 이름 지은 보이그룹을 만들어 매일 붙어 다니는가 하면, 한 학년 높은 조지, 그의 여동생 아이리스와도 친하게 지내 그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한 학년 아래의 여자 아이들 세 명이 만든 그룹에 초대되어 놀기도 한다. 보통은 금요일 하교 후, 그 주의 호스트인 아이의 부모가 초대받은 아이들을 학교에서 픽업하여 집으로 데려가 놀리고 저녁까지 먹여 보낸다. 그래서 아들이 플레이데이트를 가는 금요일 저녁엔 남편과 둘만의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 우리에겐 정말 소중한 품앗이 육아, 더구나 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너무나 좋아해서 일석이조, 금상첨화의 기회들이다.
아들의 플레이데이트 메이트 중, 채식주의자인 친구가 있다.
조지는 미생물학자인 아버지와 영양학자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 조지 엄마에 따르면, 조지는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사랑하고 환경을 생각하는 매우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이며 심성이 고운 아이였다. 백 평이 넘는 조지네 집 뒷마당에는 닭, 기니피그, 토끼와 같은 동물들이 함께 살고 있고, 세 마리의 개도 집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지낸다. 또한 뒷마당과 마주한 농장의 넓은 뜰에는 양과 젖소들이 번갈아가며 풀을 뜯고 있다. 그래서일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 육류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게.
한 번은 조지와 아들을 데리고 수영장에 간 적이 있는데, 수영 후 샤워를 하며 샴푸나 비누 같은 화학 용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그 이유를 논리적이고 확고한 신념으로 설명하는 조지에게 아들이 크게 감명받았다. 그 이후로 아들은 스스로 샴푸나 바디클렌저의 사용량을 크게 줄여나갔다.
처음 조지가 우리 집에 놀러 오기 전, 아이들을 위한 저녁 메뉴를 생각하다가 조지 엄마의 의견을 물을 겸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받은 답변은, '까다롭게 굴어서 미안해요, 조지는 채식주의자예요'.
조지의 여동생 아이리스는 아무거나 잘 먹는데, 조지만 자기 철학에 따라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부모나 조부모의 영향이 아닌 조지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그 결정을 존중해 강압적으로 아이의 식습관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 조지 부모의 선택이 존경스러웠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가정환경에서 나고 자란 내게는 가히 충격적으로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조지는 육류를 전혀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음식에 대한 거부감도 큰 아이였다. 내가 생각했던 메뉴는 카레였는데, 조지가 온 날엔, 보통 고기를 같이 볶는 조리법을 바꿔 채식카레를 만들고 남편과 아들의 카레 위에는 치킨돈가스를 올려주었다. 야채만 들어간 카레라며 권유하자, 일단 맛을 본 조지는 태어나 처음 맛본 카레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It's actually quite nice. But I'm okay, thank you."
라는 말로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거절했다.
조지가 가고 아들에게 좋은 시간을 보냈지는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가, 조지가 채식주의자인걸 알았냐고 묻자 아들이 말했다.
"He is a pescatarian, so he can eat fish(걔는 페스카테리언(Pescatarian : 생선류를 섭취하는 채식주의자)이야, 그래서 생선은 먹어)."
아, 알고 있었는데 왜 말을 안 했니, 아들.
"엄마가 조지 오는 날, 뭐 먹고 싶냐고 물었을 때 왜 말 안 해줬을까. 너 먹고 싶은 것만 말하고."
"엄마가 나 뭐 먹고 싶은지만 물었잖아."
아, 그렇구나, 내가 잘못했네.
두 번째 조지가 놀러 왔을 때는, 대구살(cod)과 새우(king prawns)를 쪄서 파슬리 소스를 곁들여 줬더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을 비워냈다. 맛있었는지 집으로 돌아가서 저녁을 많이 먹었다고 말한 조지, 그리고 그의 엄마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조지가 태어나서 새우를 처음 먹어보았다며 새로운 시도를 격려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함께. 아니, 조지야,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조지의 엄마는 조지를 설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보았다고 한다. 한창 클 나이에 고기를 먹지 않고 입도 짧아 생선이나 계란등으로 성장에 필요한 단백질을 보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이가 강력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므로 조지의 부모는 일단 한 발 물러서 있다.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전달했고, 부모로서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며 감정에도 호소해 보았으니,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고 생각하는 조지의 부모. 이제 기다려 주는 일만 남았고, 혹시나 아이가 생각을 바꾸지 않아도 그건 아이의 인생이고 선택일 것이다.
한국에 살던 시절, 같은 아파트 단지에 독일인 교수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은 한국 대학의 교수였고, 부인은 북아일랜드 대학의 교수여서 일 년에 두 번 만나는 방학부부였다. 비건(Vegan : 유제품, 계란, 생선 등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가장 보수적인 형태의 채식주의자)인 부부에겐 네 살짜리 아들(레오)이 한 명 있었는데, 엄마를 따라다니며 한국과 영국을 오가고 있었다.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에 나와있던 레오는 단지 내에서 아빠와 산책하던 중, 하교 후 나와 함께 집으로 가고 있던 아들을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쩌다 음식 얘기가 나왔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아들이 점심 급식으로 치킨을 먹었다고 하자 갑자기 레오가 근엄한 목소리를 내며, 'People eating meat are bad! Bad people!(고기 먹는 사람 나빠! 나쁜 사람들!)'라고 말했다. 별 동요 없이 'Why do you think so(왜 그렇게 생각해)?'라고 묻는 아들에게 레오는, 'Because they kill animals(살아있는 동물들을 죽이니까)!'라고 말했다. 그들이 비건인건 알고 있었고, 채식에 향과 영양을 더하라며 들기름(불포화지방산 함유)도 소개해 준 나지만, 어린아이의 질타를 받고 갑자기 멘붕이 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레오도 비건 식단으로 키우는구나,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아들이 말했다.
"Plants are alive though. If you eat fruits and leaves from trees, they were alive too(근데, 나무와 식물도 살아있어. 거기서 뜯은 잎과 열매도 살아있었던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오가 자기 아빠와 아들을 번갈아 올려다봤지만, 다행히 갈림길이 나와 우린 황급히 굿바이 할 수 있었다. 비록 레오 아버님께 난제를 투척하고 도망갔지만... 잘 수습하셨으리라 믿는다.
몇 년 전,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두 개의 언어로 사서 남편과 함께 읽었다. 어느 날 꿈을 꾸고 나서 육식을 끊고 궁극적으로 나무가 되기 위해 온갖 기행을 일삼는 영혜의 이야기, 이 그로테스크한 플롯의 소설은 우리 부부에게 큰 충격이자 메타포로 읽혔다. 특히 영혜의 아버지가 육식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딸의 입에 강제로 고기를 꾸역꾸역 집어넣으려 하는 장면에서, 이견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 휘두르는 폭력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극단적으로 과장되고 인위적으로 끌어올려진 긴장이었지만, 억압이 자행되는 과정은 결코 생소하지 않았다. 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법한 크고 작은 폭력. 의견이 존중받지 못하고 다름을 들키는 순간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던 경험. 내게 가장 안전한 곳이어야 할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묵살과 강압이라니.
초등학교 5학년인 조지의 선택을 존중하고 가치관을 지지하는 그의 부모를 보며, 난 왜 폭력과 억압으로 얼룩진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걸까. '어린 네가 뭘 안다고', '부모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 '우린 무조건 너를 위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야,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우리말만 따르면 돼'와 같은 부모의 말들 중, 과연 내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옳다고 생각한 것들이 있긴 했을까. 난 비록 존중받은 경험이 없지만, 내 아이의 인생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선택과 결정이 그 아이의 것임을 잊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난 가이드가 되어 줄 뿐, 결국 살아가면서 매 순간 결정을 하고 책임을 지는 건 아이의 몫이기에.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스스로 좋은 결정들을 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부모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전달하고 올바른 가치관과 철학을 세우도록 돕는 일, 내 역할은 거기까지다. 조지의 부모가 대단해 보인 이유도, 그들이 부모 역할의 상한선을 잘 인지하고, 아이의 자율성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스럽고 얌전한 조지가 다녀간 다음 주 금요일에는 사총사(헨리, 잭(Jack)과 잭(Jac) 그리고 아들)라고 불리는 장난꾸러기들이 놀러 와 무비데이를 가졌다. 영화 'The Bad Guys'를 보며 팝콘 반은 먹고 반은 던지고 놀던 아이들, '팝콘은 먹는 거지 던지는 거 아니거든'이라고 주의를 주자 장난을 거두고 다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헨리가 뭘 잘못 먹었는지 계속해서 방귀를 뀌자 아이들이 모두 부엌으로 대피하러 들어왔다. 헨리를 피해 온 건데 헨리도 친구들을 따라 들어오니 냄새도 함께 왔다. '얘들아, 이건 아니잖아, 거실에서 너희들끼리 알아서 할래?'라고 말하자 키득거리며 돌아간다. 몇 분 후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려 거실 쪽을 바라보니, 헨리가 문을 가로막고 악당 미소를 날리고 있다. 아마도 방귀를 뀌고 아무도 탈출 못하도록 문을 잡고 서 있는 것이리라. 사총사 중 채식주의자나 편식을 하는 아이는 없었다. 다만, 피자 라지 네 판을 굽고 너겟과 칩스를 준비했는데 순식간에 모두 동이 났다. 걸신들린 듯 먹는 아이들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낀 남편도 양손을 사용하며 허겁지겁 먹어서 십 분 만에 저녁식사가 끝이 났다. 교양 있는 패널이 방문한 듯한 조지와의 식사 시간과는 대조되는 야만적인 저녁 식사가 끝이 나자, 사총사는 이유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아들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들 친구 열명이 온듯한 소음에 시달리던 나는 8시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행복해하며 부모에게 픽업되는 아이들을 보자,
"곧 또 놀러 와!"
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와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개인의 성향이나 의견이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곳이 점점 편해진다. 비슷하지 않아서 재미를 찾는 우정이 존재하는 곳. 다름을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공존의 의미를 배울 수 있는 곳. 아이들의 의견도 소중히 받아들여지는 이곳의 문화가 좋다. 무엇보다,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개성을 표현해도 비난받지 않으며 행복하게 커 가는 아이들을 보니 안심이 된다.
*대문사진, The Veggie Gir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