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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Mar 02. 2024

어머니, 사과 안 하셔도 돼요

전염병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친구의 생일 파티에 다녀온 다음날 저녁, 아들의 컨디션이 심상치 않았다. 목이 좀 따끔거린다면서 프로폴리스 스프레이를 뿌리고 스트렙실 하나를 먹은 후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 시간 간격으로 깨면서 불편함을 호소했다. 덥다고 해서 체온을 체크해 보니 37.2도, 열이 있다기에는 애매한 상태였다. 자정이 넘어서도 계속 뒤척이던 아이는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아이 학교에 연락하기 위해 알람을 맞춘  나도 겨우 눈을 붙였다.


정오쯤 되자 아이의 상체, 특히 가슴과 배 부위에 발진이 올라와 있었다. 37.5도의 미열, 약간의 목 통증이 있다고 하면서도, 아이는 학교를 갔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잘 먹고 잘 놀았다. 그러나 밤이 되자 39도에 가까운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 전화를 걸어 진료 예약을 하고 오전 11시쯤 GP(NHS 일반의)를 만나러 갔다. 아이의 병명은 스칼렛피버(Scarlet Fever), 우리말로 성홍열이었다. 이 병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병원을 다녀와 걱정을 하고 계시던 어머니께 문자를 보내 아이의 병명을 말씀드렸다. 십 분쯤 지났을까, 어머니로부터 음성메시지가 왔다.

"내가 알아보니 스칼렛피버는 전염성이 강해 학교에 알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너희가 바쁘다면 내가 학교에 전화할게."

어머니의 의도는 무조건 선하다. 공동체를 생각하시는 마음도 이해한다. 하지만, 아이는 학교에서 아무런 증상도 없었고, 집에 머무르며 이런저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굳이 학교에 알려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이유가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뭔가 억울했다. 아이가 옮았다는 건, 증상이 있었던 어떤 아이가 학교에 등교했었거나 파티에 참석했었다는 말인데, 왜 우리만 학교에 알려서 내 아이가 1호 성홍열 환자로 낙인찍혀야 하는 거지?


코로나를 겪으며 전염병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많은 변화가 생겼. 특히 코로나 창궐 초기에 확진자의 동선이 모두 까발려지는 처참한 사생활 침해의 사례들을 목도하고, 그들을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야만적인 마녀 사냥도 심심치 않게 목격했기에, 이런 식의 질병 커밍아웃에는 거부감부터 들었다. 특히 그에 따라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불공정한 시선이 향하거나 불이익이 간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볼게요, 어머니. 학교나 파티에서 아이에겐 아무런 증상도 없었어요. 저희가 찾아보니 기관에 성홍열 발생을 경고하는 건 의사의 의무지 학부모의 의무는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은 드렸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 역시, 만에 하나 우리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보는 상황은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상의 끝에 학교 교장 선생님께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병의 경과가 어땠는지 정확히 알려드리고, 혹시나 누구든 편도염과 함께 발진, 발열이 발생한다면 병원을 방문해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아이의 의사 선생님에 따르면, 성홍열은 페니실린으로 1차 방어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10일 정도 소요된다. 5일만 처방받는 일반적인 박테리아성 편도염에 비해 치료가 힘들기 때문에 기간을 두 배 늘려 항생제를 복용해야 한다. 항생체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합병증을 동반할 수 있어 반드시 약을 복용하고 경과를 지켜보아야 한다. 한 시간 이내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이 왔고, 그날 오후 늦게 학교 전체 공지를 통해 교내 성홍열 발생을 알리는 문자가 도착했다. 교장 선생님의 메일에는, 아이를 향한 걱정과 이런 보고를 해준 부모(우리)에 대한 고마움이 다정하고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학교에 보고 후 받은 단체문자


점심을 먹고 아이와 데블스플랜(넷플릭스 리얼 예능)을 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백합을 한 아름  어머니께서 서 계셨다.

"아침에 너희에게 불필요한 소리를 한 것 같아서 사과하려고 왔어. 너희가 부모이니 아이에 관한 모든 건 전적으로 너희의 결정인데, 내가 간섭을 해서 너희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 봐. 난 그저, 적절한 치료 시기와 방법을 놓쳐서 고생하거나 위험해 질지도 모르는 아이가 단 한 명이라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어. 정말 미안하다, 내 사과를 받아줄래?"

어머니의 진심을 듣는데 눈물이 났다. 그래, 우리 어머니는 그런 분이시지. 당신께서 감내해야 할지도 모를 시선보다, 보호받지 못해 아플지도 모를  아이를 걱정하시는 다정한 분. 자신향하는 화살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당신으로 인해 피해가 가는 건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막고 싶어 하시는 용감한 분.

"아니에요, 어머니 말씀이 옳아요. 학교에 메일을 보냈고 Mrs. Williams(교장선생님)로부터 감사의 답장도 받았어요. 단지 저희는, 아이도 어딘가에서 옮아온 건데, 어느 누구도 저희에게 알려주지 않았단 사실에 잠시 화가 났었어요. 그 감정을 처리하는 과정에 시간이 좀 필요했을 뿐이에요. 조언도 감사했고 꽃도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


페니실린을 복용한 지 하루 만에 아이는 컨디션을 되찾았다. 의사는, 항생제 복용 시작 후 24시간이 지나면 감염의 위험이 없다고 했지만, 하루 4번 정해진 시간에 약을 복용해야 했고 약은 냉장보관이 필수였기 때문에, 아이는 집에 머물며 나 홀로 방학을 즐겼다. 약이 몸속 잠재적 병균들까지 모조리 잡아먹어서인지, 아이는 유례없는 최고조의 컨디션을 보이며 집안을 네발로 어다녔다. 이러다 나에게 번아웃이 오겠는데, 싶어 칩거 9일째 되는 날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에 갔다. 평소 아이는 나와 남편이 수영을 할 동안 같이 놀만한 친구를 찾아 장난만 치는데, 그날은 우리와 함께 1km를 수영하며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래도 체력이 소진되지 않아 저녁을 먹고 아빠와 바닷가 산책을 나간 아들. 하, 내가 먹이는 게 레드불이 아니라 페니실린이 맞겠지, 말도 안 되는 의심이지만 괜스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으며 병을 흘깃거렸.


어머니께서 주말에 인도음식을 배달시켜 먹자며 우리를 초대하셨다. 내가 하루라도 저녁을 짓는 수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리라. 영혼 탈출의 상태로 아이와 다운폴(downfall: 보드게임의 한 종류)을 하다가 어머니의 백합을 바라보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충전되며 다시 힘이 난다.

 "토요일에 할머니께 꽃 사다 드릴까?"

내가 물으니,

"Grandma는 보석 좋아하셔."

라는 아들. 그래, 그럼 그건 네가 사다 드리렴, 엄마는 꽃을 선물할게.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호접란을 사다 드려야겠다, 생각하며 다섯 개의 코인을 모두 내보내고(다운폴에서 다섯 개 코인을 모두 먼저 내보내면 승리) 기뻐하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사진, 어머니께서 사다 주신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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