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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Feb 23. 2024

새치기하는 자의 최후

어제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테스코에서 장을 본 후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회전교차로에서 세 번째 출구로 나가야 하는 나는, 안쪽 레인(제일 오른쪽)에서 출발해 왼쪽 사이드미러를 곁눈질하며 접근 중이었다. 두 번째 출구에서 속력을 내며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고 갑자기 끼어든 차 한 대 때문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영국에 돌아와 운전을 시작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교통사고도 잘 나지 않을뿐더러 차 경적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작은 타운에서 끼어드는 차를 보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칼치기나 새치기하는 차가 싫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깨뜨리고 타인을 위험에 빠뜨리는 그들이 제대로 처벌받기를 원한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읽은 책 중에 '깨진 유리창 법칙'이란 경영서가 있다. 행정, 경영관리의 관점에서 쓰인 책인데 사실 그 이론의 탄생은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의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s)'이론. 핵심은, 깨진 유리창 하나(사소한 범죄)를 방치해 두면 그 부분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된다는 것인데, 사회 무질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이론이다. 이후에 작은 문제들을 고치면 크고 심각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가설의 확장으로 이어져, 1990년대 이후 뉴욕 지하철 치안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1980년대 초 뉴욕 지하철 역사 내의 그래피티를 모두 지우고 깨끗하게 관리한 후 15년 내 범죄율이 극감함).


이미 깨져있는 유리창을 본다면, 조금 더 유리를 깨뜨리는 일에 죄책감이 줄어든다. 깨끗한 도로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보다, 이미 더러운 장소에 쓰레기를 던지는 게 훨씬 더 쉬운 느낌이랄까. 난 세상에 법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다고 믿는데, 여기서 내가 잠재적으로 가정하는 건 여건이 되면 규칙을 어길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아침에 회전교차로에서 내 앞으로 칼치기해 들어온 그 운전자처럼. 물론 사정이 있었을 수 있다. 옆에 심각한 부상 환자나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가 타고 있어서 급하게 병원을 가야 했을 경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은 혼자였다. 똥을 싸기 일보 직전이어서 눈에 뵈는 게 없었을 경우, 이미 이성이 마비되었을 것이므로 차유리 태닝이 전혀 안되어있는 영국 차들 사이에서 그런 좀비 정신 상태의 운전자를 가려내기란 어렵지 않았을 텐데, 그는 침착했고 거만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깨진 유리창 조각이다.


나는 운전을 잘하고 시야도 넓으며 예측도 정확한 편이라 도로에서 긴장할 일은 별로 없다. 그렇다고 과속을 하거나 과격하게 운전하지도 않으므로 내가 운전하는 차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원칙주의자인 나는 규칙을 잘 지킨다. 신호를 잘 준수하고 제한된 속도를 어기는 법 없이 그 제약 안에서도 운전은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 그런데, 새치기하는 차를 보면 마음속 여유가 싹 사라져 버린다.


물론, 나로 하여금 브레이크를 밟지 않게 하는 차들은 예외다. 그들은 그야말로 교통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자들이며 충분히 거리를 두고 들어오기 때문에 서로 간에 얼굴 붉힐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공간이 없는데 칼치기로 들어와 급정거를 하게 만든다든지, 뻔히 줄지어 들어가는 차들을 보면서 줄의 맨 앞으로 꾸역꾸역 차를 몰아 끼어들기 시도를 한다든지, 그러면서도 창문을 내려 '초행길이에요, 저 좀 끼워주세요'라는 사과의 제스처하지 않는다든지, 그런 차들은 봐주기 힘들다.


예외는 있는데, 끼워주지 않으면 차 뒤로 긴 줄이 생기며 차선이 막혀 애먼 피해자들이 생기는 경우이다. 그때는 최대 다수의 행복을 고려해 새치기를 끼워준다. 나쁜 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한 놈 때문에 피해를 보는 다른 차들을 위해서. 뒤에서 울리는 경적소리, 창문을 내리고 욕하는 소리 그 모든 부정적 반응들도 그들의 새치기 습관을 바꾸지 못할 거란 게 내 생각이다. 진짜 몰랐던 경우를 제외하면, 뻔뻔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새치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거고, 그런 자들은 수치심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피드백이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나아지기 힘들다.


5년 전쯤인가, 서울의 한 백화점에 들어가기 위해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줄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었다. 주말이라 차 한 대가 빠져야 한 대가 들어가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오른쪽으로는 백화점 입구이고, 왼쪽은 고가를 타도록 길이 갈라져 있었는데 내 차 뒤로 두세 대 정도 떨어진 곳에서 검은색 차 한 대가 끼어들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합심한 듯 서로의 간격을 바짝 조여가며 그 차를 방어하고 있었다. 여의치 않자 그 차가 순간 굉음을 내더니 내 옆으로 붙는 게 아닌가. 갑자기 신경이 곤두서며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절대 끼워줄 수 없어! 나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앞차와 간격을 좁히고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앞쪽으로 길을 나누는 플라스틱 볼라드가 보였다. 얼마 안 남았다. 마침 왼쪽 고가도로 진입 상황은 교통이 원활했다. 뒤에서 기다릴 차도 없으니 그 얌체 같은 차를 끼워줄 이유는 더더욱 없다. 모든 사람이 30분이 넘게 걸려 이 자리까지 왔는데. 그런데 갑자기 쿵, 뒤에서 거리를 좁히던 리세이드가 내 차 후미를 살짝 박아버렸다. 한국에서 교통사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한 남편이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지금 차가 박은 거야?' 물었다. 나는, 마치 마지막 전투를 앞둔 장군처럼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그리고는 앞차가 움직이길 조금 더 기다렸다가 볼라드가 시작되는 곳에 최대한 왼쪽으로 붙이고 비상등을 켠 채 내렸다. 뒤차 운전자도 바로 정차를 하고 벌게진 얼굴로 하차했다. 우리 둘 다 끼어들기 가능한 공간을 막으며 정차를 고 사고 수습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 검은색 차 운전자는 다시 굉음을 내며 고가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그 차가 떠나자마자, 나는 우리 뒤로 늘어선 다른 차들을 생각해, 팰리세이드 운전자의 연락처만 받은 뒤 다시 차에 올랐다. 백화점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그 운전자에게 연락이 왔다. 문제가 있으면 연락 달라면서 죄송하다고 거듭 인사하고 있었다. '아까 이미 확인했지만, 아무 문제없어요. 새치기하려던 차 때문에 별 일을 다 겪네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답을 한 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피할 수 있었던 상황이지 않나, 혹자는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새치기하는 차 하나를 끼워주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에 더 큰 일을 겪은 게 아닌가, 하고. 그냥 끼워주고 블랙박스를 제출해서 과태료(도로교통법상 정차나 서행 중이면 점선이어도 끼어들기는 불법임) 물게 하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새치기하는 차들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의지를 꺾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하고 싶다. 그렇게 사소한 말썽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다니는 자들이 사라져야 도로 위의 안녕과 평화가 앞당겨 질거라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시작일 뿐이다. 음주 운전처럼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저지르는 의도적인 악행들, 자기 차의 사각지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신호 위반까지 해 가며 우회전으로 인명 사고를 내는 수많은 운전자들, 실수라고 하기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졸음운전 사고 등도 켜켜이 쌓여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이다. 도로 위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문제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지만, 결국 바뀌어야 하는 건 마인드셋이다. 내가 1분 빨리 가기 위해 원칙을 어긴다면, 작은 규칙들을 깨뜨리며 사회의 분노와 혼란을 야기한다면,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큰 유리창이 언젠가는 박살 날 것이기에. 그 최초의 깨진 유리창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가 십시일반 노력해야, 운전 문화는 보다 성숙하고 안전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미 깨져버린 유리창이 있다면, 더 엄격하게 관리하고 하루빨리 수선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에서 내가 보행자일 때, 특히 아이의 초등학교 주변 횡단보도를 지날 때, 신호위반 하는 차들이 보이면 모조리 동영상을 찍어 신고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곳에 신호위반 차량들이라니... 녹색 신호에 건너도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현실 앞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게 다였다. 그래서, 더욱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에 와 살면서 과거 고발 정신을 완전히 잊고 지냈다. 런던으로 돌아갔다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노년 인구가 많은 이 작은 타운에서는 운전자 대부분이 양보할 준비가 돼 있고, 을 어기기는커녕 과속하는 차도 없어서 그런 생각 자체를 못하고 있었다.


남편과 같이 회전교차로 룰을 찾아보니, 무조건 오른쪽에서 오는 차들에게 giving way(길을 내줌)를 하는 것이 규칙이다. 위협이 되는 끼어들기는 증거를 제출하면 운전자에 50파운드가량의 벌금(추정이며 운전자 사정과 경찰 재량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이 부과된다.


오랜만에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불끈 의지가 샘솟는다. 로컬 폴리스에는  한국처럼 스마트폰으로 간편히 신고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으므로, 이 블랙박스 풋티지를 어떤 방법으로 제출해야 할지 이제부터 알아봐야겠다. 단 한 명의 위협적인 운전자도 남아있지 않을 그날까지(평생이겠지만) 수고와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진 출처, 한문철 TV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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