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nah Feb 08. 2024

친절할 필요는 없지만, 무례할 이유도 없잖아요

아마존에서 구입한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반품을 위해 우체국을 찾았다. 정확히 말하면 우체국 대행 업무를 하는 코너샵인데, 영국에선 우체국 업무를 대신해 주는 이런 뉴스에어전트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간대에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몰려 순식간에 긴 줄이 생겼다. 한국이었다면  분 안에 처리될 수 있는 일들도 이곳에선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오디오북이나 들으며 기다릴까 싶어 이어팟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카운터에서 언쟁이 시작됐는데, 한 할머니께서 샵 주인인 산제이에게 불평을 늘어놓다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셨. 자세히 들어보니 문제가 된 건 산제이의 '말투와 태도'였다. 그녀는 화가 나서, 'ungracious, disrespectful' 같은 단어를 내뱉으며 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산제이는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인도에서 온 이민자인데, 영어가 유창하지 않고 말투가 딱딱하며, 기본적인 예의를 중요시 여기는 이 나라에서 'Thank you' 나 'I am sorry' 같은 인사를 깜빡하여 의도와 다르게 오해를 사는 인물이다. 하지만, 우체국을 자주 들락날락 거리는 나는 그의 단면만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말투나 태도에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한 번은,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네 아이들 서너 명이 몰려와 산제이에게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를 열어주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때의 산제이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는데, 입이 귀에 걸린 채 모든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아이들과 순수한 행복을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이 입구를 닫으면서 들어와 순식간에 가게 안이 파티 분위기가 나도록 음악을 틀고 팡파르를 불었는데, 졸지에 가게 안에 갇힌 유일한 손님이었던 나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박수를 치며 생일축하송을 불렀다. 누군가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해서일까 이후 심리적으로 그가 가깝게 느껴졌지만, 그는 다시 무표정에 딱딱한 말투를 지닌 산제이로 돌아갔다. 어느 날 그는, 아빠에 이끌려 자지러지게 울면서 가게로 들어온 한 아이에게 이런저런 캔디를 건네며 아이의 울음을 잠재우기도 했다. 이십 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다 큰 딸이 있지만, 정작 그녀와는 데면데면하면서, 동네 꼬마들에겐 한없이 자상한 미소를 보여주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우체국 남자, 산제이.


사건은, 그 할머니가 포스트코드(우편번호)를 잘못 적어와서 시스템상에서 받는 이의 주소를 찾을 수 없었던 게 발단이었다. 그걸 설명하는 과정에서 산제이의 말투가 거슬렸던 할머니는 무례하다는 호통을 치며 십 분이 넘는 시간 동안 카운터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줄이 점점 길어졌지만, 가게 안 모든 사람이 그저 빨리 일이 해결되기만을 바라며 조용히 기다렸다.

"화낼 일이 아니에요. 집에 가서 정확한 우편번호를 가지고 오세요. 다시 해드릴게요."

라고 그가 사무적으로 말하며 할머니를 돌려보내려 애썼다. 결국 듣고 싶었던 사과의 말을 못 듣고 더 화가 난 상태로 우체국을 나선 할머니. 나가면서도 계속해서 모두에게 들리도록 산제이를 비난했다.


다음 순서였던 중년의 여성이 카운터에 서자,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산제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조금은 과장된 친절로, 이전에는 하지 않던 질문들도 해가며. 그래서 그가 정서적으로 타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나쁜 사람으로 보였을까 걱정하며 열심히 만회하려 애쓰던 산제이는, 내 앞의 남자와는 껄껄 웃는 농담까지 하며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노력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카운터의 불친절함이 내 기분에 영향을 주지 않은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로만 살았던 이십 대 때는 누군가의 불친절함이 내 기분을 잠식해 하루종일 우울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댄 적도 있었다. 


학부 때 나는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늘 도서관에 있었는데, 도서관 대출 카운터에서 일하던 한 여학생 때문에 한동안 책을 빌리는 일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녀가 늘 책을 던지다시피 해서, 반말을 섞어가며 모든 문장을 심드렁하게 말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누군가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오늘은 그녀가 책을 얼마나 멀리 던질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줄을 서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내 앞으로 세 번째에 서 있던 고학년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 여학생에게 '책 던지지 말아 주세요.'라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말을 하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마치 혼잣말처럼 '안 던졌는데?'라고 한 뒤 하던 일을 이어갔다. '아니, 던졌는데? 내가 봤는데?'라는 유치한 대사를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내 앞에서, 차분하고 우아한 그 선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던졌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친절할 필요는 없지만, 무례할 이유도 없잖아요?"

순간 말문이 막힌 듯한 그녀가 눈을 한번 흘기더니 잠자코 대출 업무를 해나갔다. 그 이상의 논쟁은 없었다. 그렇게 모두의 히어로인 고학년 선배 언니가 떠나자, 그 여학생은 옆 사람에게 잠깐 업무를 부탁하고 자리를 비웠다.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 해야 할 말을 또렷하게 전달하던 선배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는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난, 카운터의 불친절을 대하는 모든 순간마다 그 선배를 떠올린다.


산제이의 불친절한 말투가 어떤 부분에서 그 할머니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는 내가 그녀가 아니므로 알 수 없다. 그래도 지켜본 자로서 아쉬움이 남는다. 꼭 그렇게 일방적으로 분출하듯 화를 냈어야 했을까. 산제이에게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던지거나, 좋은 말로 조언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누군가를 공격적으로 비난하면, 상대는 일단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발전의 가능성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상대로부터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폭발하듯 분노를 잔뜩 실어 전달하면 전해야 할 사실은 사라져 버리고 찌꺼기 같은 지저분한 감정만 남아 관계를 더럽힌다. 그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그 일이 있고 난 후 산제이는 조금 변한 것처럼 보인다. 내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예전보다 밝게 인사를 받아주고, 심지어 고맙다, 하루 잘 보내라, 등과 같은 인사도 한다.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보며 스티븐 코비가 언급한 'Emotional bank account(감정은행계좌)'가 떠올랐다. 코비에 따르면, 사람 사이에는 감정계좌가 존재하는데, 마치 은행계좌처럼 입출금을 잘 관리해 주어야 관계가 잘 유지되고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즉, 부정적인 감정(감정 인출)들만 계속해서 쌓이면 결국 파산에 이르며 관계도 끝이 나지만, 평소 열심히 긍정적인 감정들을 저축해 두면 혹여 실수를 하더라도 만회할 수 있고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


감정 저축의 한 방법이 '친절하기'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걱정해서인지, 아니면 그 할머니 사건 이후 정서적으로 큰 인출이 있었기 때문에 만회하려는 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산제이의 태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의 친절이 쌓이면, 언젠가 그가 미처 다정하지 못한 순간이 오더라도, 누군가는 그의 의도를 의심하거나 오해하지 않고 그를 믿어줄 수 있지 않을까. 산제이의 변화가 반갑고 그를 응원하고 싶은 이유다.





※ 아이의 half term 방학이 곧 시작이라 이번 주는 이틀 앞당겨 발행합니다. 모두들 친절하고 다정한 설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진 출처, Pinterest

이전 14화 프레디 엄마의 이중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