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이 이중적이다'라고 말할 때,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가 많다.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야, 여기서 하는 말과 저기서 하는 말이 달라 등과 같이 일관되지 못한 성품이나 정직하지 못한 성격을 일괄하는 말로 쓰인다. 실제 이중성의 사전적 의미는 보다 중립적이다. 선과 악이 뚜렷하게 나뉘어 발현되지 않고 사람의 성격과 평가가 상대적일 수 있음을 뜻한다.
나에겐, 이중적인 사람이 매력적이다. 이중성을 '반전' 혹은 '입체성'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어, 냉정해 보였던 사람이 사실은 마음이 여린 순둥이라든지,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가벼워 보였던 사람이 알고 보니 자기 분야의 능력자라든지, 하는 식의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 난 그들이 흥미롭다고 느낀다.
냉철하고 차가운 도시남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은 알고 보니 유머를 최대 레벨로 탑재한 철부지였고, 깐깐한 구두쇠인 줄만 알았던 시아버님은 따뜻한 마음을 지닌 순수한 소년 같은 분이셨으며, 남편의 베스트프렌드로 소개받은 카사노바인 척했던 제부는 세상에서 제일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빠가 될 사람이었다.
평소 너무 조용하고 얌전해서 극내향인으로 보였던 나의 헤어드레서는 노래방을 함께 갔더니 신발을 벗고 테이블 위로 올라가 춤을 추며 마이크를 놓지 않아 나를 놀라게 했다. 런던에서 만나 친해진 필리핀 친구 한 명은 수수하고 검소하여 국가장학생으로 지원받아 대학원 공부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내가 살면서 만난 그 누구보다 가장 부유한 집안에서 큰 공주였다. 사람들에게 쌀쌀맞게 굴어 거리를 두었던 대학 과 동기 한 명은, 그룹과제를 하며 친해진 이후 따뜻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 나를 감동시켰다. 완벽하고 화려해 보였던 친구가 사실은 구멍이 숭숭 뚫린 실수투성이의 귀여운 존재임을 알게 되면 갑자기 그녀가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이 일관성이 없어."
난 이 말이 나쁘게만은 들리지 않는다. 꼭, 어떤 일에든 일관성이 있어야 할까? 사람은 변화무쌍한 존재인데?
밋밋한 성격에 마치 감칠맛 나는 조미료를 더해주는 듯한 이중성. 어, 알고 보니 아니네?라는 순간이 가져오는 쾌감. 난 이중적인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
물론 그 이중성이 악에 기반하여 다른 사람을 골탕 먹이거나 공격하고 관계를 이간질시키는데 쓰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 남편이 현재 푹 빠져서 월요일이 되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드라마(엔딩 장면에서 'No~~~'라는 외침과 함께 절규함), '내 남편과 결혼해 줘'에 나오는 정수민 같은 악녀가 보여주는 이중성은 논외다. 그런 나르시시스트의 악랄한 계략과 가스라이팅을 논하자면 글 전체를 할애해도 모자라니까.
아들 반에 프레디라는 아이가 있다. 생김새가 핏불테리어처럼 탄탄하고 근육질인데 성격도 과감하고 공격적이다. 아들의 생일파티에 와서 어찌나 정신없이 뛰어다니던지, 하루종일 에너지를 비축했다가 파티에 와서 모조리 발산하는 건가 싶었지만, 프레디의 엄마로부터 그날 아이를 데리고 리버풀(차로 80분 거리)에 가서 축구 경기를 직관하고 왔다는 말을 듣고 아이의 에너지에 많이 놀랐었다. 아침 일찍부터 두 시간 축구 수업을 받고 리버풀 경기장을 다녀온 후, 또다시 레이저건 파티에서 두 시간을 쉬지 않고 뛰어놀 수 있다니.
프레디의 엄마는 친해지기 쉬운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고하나 보이지 않지만 럭셔리하고 우아한 옷차림(이 동네에서는 보기 드물게 카멜색 캐시미어 정장 코트에 가죽 앵클부츠)을 하고, 항상 잘 손질된 찰랑거리는 금발에 잡티하나 없는 피부를 가지고 있다. 아름답고 도도해 보이는 그녀는 세련된 upper class의 엑센트를 가진 여자다.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테스코나 리들에서 자주 마주치기 때문에 일을 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아우디 A8을 타고 다니는 걸로 보아 경제적으로 넉넉해 보인다. 우아한 그녀는 하굣길에 프레디에게 항상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Calm down(진정해)'이라고 말하며, 학교 앞 좁은 인도 위를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혀 가며 지그재그로 걷는 아들을 진정시키려 애쓴다.
저번 주에 학교 가까이에 차 댈 곳이 없어 조금 멀리 주차를 한 날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아이와 차까지 걷고 있는데 저 앞에 프레디와 엄마가 보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주차된 차들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발로 차고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걷던 프레디. 그러다 어떤 집 낮은 담장 안에 조용히 앉아 있던 개를 보더니 크게 개 짖는 소리를 내며 담장에 매달리는 게 아닌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갑자기 봉변을 당한 개도 지지 않고 짖기 시작했다. 놀란 개가 사납게 짖자, 집 안에서 사람이 나와 개 이름을 불렀다.
"Hey Joe! (그래도 진정되지 않자) What's the matter(뭐가 문제야)?"
라고 개에게 소리치는 집주인. 그러자 프레디의 엄마가 말한다.
"Sorry, my dog barked first(미안해요, 내 개가 먼저 짖었어요)."
순간 빵 터진 나는 큰 소리를 내 웃었다. 웃음소리가 나자 뒤를 돌아본 프레디의 엄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난데없이 윙크를 날렸다. 아들을 개라고 부르고 여유롭게 윙크라니, 아, 이 여인 너무 매력 있는데?라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그녀가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재밌는 성격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을 한 적이 있었다. 작년 여름, 타운에서 페스티벌이 있어 구경하러 갔다가 프레디와 엄마를 만난 적이 있다. 축제 행사의 한 꼭지로 도그쇼가 진행 중이었는데, 그걸 구경하러 가던 길에 똥(비유적 표현이 아닌 진짜 똥)을 밟고 욕을 하고 있던 그녀를 지나친 적이 있다. 단아한 정치인의 아내 같은 이미지의 그녀 입에서 험하디 험한 욕들이 짧고 굵게 튀어나왔다.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실례가 아닌가 싶어 숨죽이고 지나가려던 찰나, 나를 본 그녀가 아름다운 미소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는 욕을 잘하는 사람이 부럽다. 사람에게 하는 욕이 아니라 상황이나 실수에 대한 것이라면 거부감도 없다. 가끔 강조의 의미로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재치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어쩌다 욕을 한마디라도 하면, 내 동생은 '초등학생도 웃겠는데?'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래서 더 자신이 없어졌고 안 하다 보니 더 못하게 됐다. 대학을 다닐 때, 학과(심리학과)에 캐나다 오타와 대학에서 교환 교수로 와 계신 할아버지 교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욕테라피'라는 치료법을 언급하신 적이 있었다. 수업을 듣던 몇몇 학생들은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고 '뭐야~'라며 낮게 읊조리는 애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굉장한 흥미를 느끼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분의 수업은 손가락으로 눈을 벌려 부릅떠야 할 정도로 지루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날만은 그 어떤 학생들보다 집중해서 진지하게 수업을 들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한 번의 강의로 욕에 대한 욕구가 채워질 순 없었다. 연습과 맥락 없이는 발전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욕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품고 사는 내 앞에서 걸쭉한 욕을 시전 한 프레디의 엄마.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멋들어지게 욕을 내뱉던 그녀가 너무 쿨해 보여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아직은 아이들을 통해 서서히 알아가는 단계지만, 저번 아이의 생일파티를 계기로 전화번호도 주고받았고 가끔 연락하며 안부도 묻고 있으니 가까운 미래에는 차 한 잔 하며 이야기 나눌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타인과 친해지는 이유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반전 매력만큼 마음에 큰 돌을 던지는 건 없는 것 같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이중성을 보여주는 상대라면 많은 에너지를 써서라도 친해져 보고 싶다. 아, 그런데 또, 너무 친해지는 건 불편한데... 친해지고는 싶지만 매우 가까워지는 건 부담스럽다. 이런 나의 이중적인 마음도 누군가로부터 이해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