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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Apr 20. 2024

사립학교 가는 친구를 위한 조언

오후 3시 32분. 선생님을 따라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오는 아이가 보였다. 평소 같으면 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아이인데, 오늘따라 함께 걸어 나오는 헨리와 무슨 재미난 대화를 나누는지 한참 몰두하느라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할머니께 인계되며 헨리가 아들에게 말했다.

"I'm going to tell my mum about this today. Thanks bro, wish me luck."

엄마에게 뭘 말한다는 걸까, 아들이 뭐라고 했길래 고마워하는 거지? 궁금한 마음에 차에 오르자마자 아들에게 물었다.

"헨리랑 무슨 얘기했어?"

"아, 헨리가 저번주부터 수영 아카데미 가기 시작했는데, 너무너무 싫대. 그래서 내가, 헨리 네가 정말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걔가 생존 수영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일주일에 세 번씩 훈련을 받는다잖아. 싫은 걸 어떻게 일주일에 세 번이나 할 수 있겠어? 그래서 네 인생은 네가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말해줬지. 그랬더니 오늘 자기 엄마한테 그렇게 얘기할 거래."

아... 아들... 너도 네 인생을 스스로 결정 안 하고 있는데 왜 친구에게 그런 충고를 한 거니. 어떻게 수습하지?


아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아들이 진짜 하기 싫다는 걸 강요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선호가 분명하지 않고 까다롭거나 고집스럽지 않은 아들은 설득이 쉬운 아이다. 주짓수와 수영,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다. 별생각 없이 '응, 한 번 해볼게'라는 아이의 동의로 시작했고, 중간에 하기 싫다는 의사를 내비친 적은 있지만, 그런 기술들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 설명해 주자 바로 '오케이, 좀 더 해볼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족끼리 다 같이 하면 좋잖아' 하면서 테니스를 배우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니 '엄마, 아빠가 하는데 내가 빠질 순 없지'라며 흔쾌히 테니스 레슨도 받기 시작했다. 지금은 모든 운동을 너무나 좋아하고, 심지어 바이올린마저도 (실력과 상관없이) 즐기는 아들. 강한 저항을 해 본 적이 없기에 본인의 의지대로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 부부의 물밑 작업이 있었고 설득과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다. 그 모든 계획과 노력과 인내를 모르는 아들이 무턱대고 헨리에게 그런 극단적인 조언을 한 것이다. 가기 싫어하는 헨리를 억지로 수영장에 데려가는 것도 새미(헨리의 엄마, 사만다의 애칭)에겐 고역일 텐데, 아들이, 조언이라는 명목으로 너무나 큰 장애물을 투척해 버렸으니 이 일을 어쩐다.


헨리는 대대로 건축가인 집안에서 자란 도련님 같은(공손하게 사람들에게 지시를 잘하는) 아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이 타운에 있는 유일한 사립학교(영국에서는 public school이라고 함) 출신이며, 따라서 헨리도 당연히 그 수순을 밟는다. 남편이 (영국 보딩스쿨을 나와) 옥스퍼드 출신 변호사인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퍼블릭 스쿨 졸업자인데 아들이 공립학교(state school)를 다니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들의 출신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립에서는 학문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스포츠, 예술 분야에서도 아이들이 소질을 키워 발전할 수 있도록 장려하기 때문에 뭐든 배우고 가면 도움이 된다. 특정 분야에 뛰어나면 장학금과 같은 혜택도 커서, 아이들이 따라오기만 한다면 부모로서는 욕심이 날 도 하다. 올해 9월부터 사립학교에 입학하는 헨리 역시 그런 취지에서 수영 훈련을 받기 시작한 것이리라. 친목 위주의 클럽이 아닌 훈련 중심의 아카데미에 등록한 걸 보면.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우리도 여건이 되는 한 사립학교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지금 우리의 재정 상태로는 무리고, 2년 반 안에 계획한 passive income(안정적인 부수입의 한 형태)이 생길 경우 겨우 고려해 볼 수 있다. 아이가 현재 주소지에서 갈 수 있는 공립 secondary  school은 세 군데인데, 남편은 그중 한 곳을 나왔다. 평범한 학교였지만, 매일 육탄전이 벌어졌고, 수업 분위기는 나빴고, 선생님들은 무관심했고, 대학으로 진학한 학생은 전체 졸업생의 40퍼센트도 채 안 됐다. 가끔 남편이 동창들을 만날 때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며 가장 자주 하는 말은,

"We survived(안 죽고 살아남았어)."

이다. 야생 혹은 동물의 세계와도 같았던 남편의 중고등학교 시절 무용담, 아이가 그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찔하고 두렵다. 심지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쿨하지 못한 행위(?)로 간주되어 너드라고 불리며 놀림을 받고, 그래서 단체로 공부를 등한시하는 하향평준화의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니, 이 무슨 '다 같이 바보 되자' 운동인지. 공부를 잘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열심히 해 본 경험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일을 끈기 있게 해 내거나 자신이 원하는 길로 묵묵히 걸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소한 성공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노력했던 자신이 뿌듯한) 긍정적인 경험을 해 보지 못하면 스스로를 믿으며 하고 싶은 일을 좇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내가 살고 있는 타운에서는, 립을 가느냐 공립을 가느냐에 따라 중학교 이후 교육의 질에 차이가 난다. 특히 에세이 쓰기와 같이 대학 입시에 중요한 스킬선생님의 역량에 따라 아웃풋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 기본적인 교육에서 강조하는 부분도 공립과는 다른데, 사립에서는, '세계적인 리더가 될 인재를 양성한다'는 모토 아래, 리더십 교육이 뒷받침된다. 학교 교육만 충실히 따라가고 피드백만 잘 반영해도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게 어렵지 않다. 잠을 줄이고, 일정 기간 동안의 행복을 반납해 가며 희생하지 않아도 목표한 점수를 획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사회적 자본이론에서 말하는 '네트워크'를 일찌감치 형성함으로써 미래에 좋은 기회를 제공받거나 의미 있는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거나 희소한 정보에의 접근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등의 크나큰 장점이 있다. 성공으로 향하는 여정의 출발선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성공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정한 목표가 있다면, 조금 더 쉽게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고 싶은 부모로서의 욕심은 있다. 아, 사립의 장점을 쓰다 보니 너무 배가 아프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그럴 확률이 높아서) 보낼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


어린 시절 경미한 난독증으로 매번 글쓰기에 고전한 남편에게 시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넌 절대 선생님은 될 수 없으니 다른 직종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남편은 적성에 맞지 않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십 년을 버텼다. 하고 싶은 공부를 찾고 서른다섯에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를 끝내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 남편은 교육대학에서 선생님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 시절 (가정과 학교 모두에서) 적당한 서포트가 없었음에 늘 아쉬워한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긴 여행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충분한 사랑을 주는 것과 능력을 믿어주고 적합한 도움을 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넘치는 사랑은 주셨지만 자신의 능력을 믿어주시지는 않았던 부모님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를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아이에게 많은 사랑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건, 무조건적인 사랑, 자기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작은 성공의 경험들,  실수에 대한 포용력, 인내와 믿음,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시기에 맞는 도움을 주는 일, 이 모든 노력의 복합체이다. 아이의 발전을 돕기 위해 지금처럼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기로 다짐한다. 함께 고전을 읽고 토론하고,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글쓰기도 해보고, 되도록이면 자주 여행을 다니고, 함께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하고 싶은 운동을 실컷 하게 해주는 일, 현재 우리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다. 비록 지름길(사립학교에 보내주는 일)을 열어줄 순 없지만, 아이 곁에서 함께 걸으며 시기적절한 도움을 주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가 헨리에게 조언을 해준지는 삼일이 지났다. 논쟁이 있었다면, 연락을 안 하고 지내는 사이도 아닌데 어떤 식으로든 헨리 부모의 피드백이 있었을 거라는 남편의 말에 안심은 되지만, 만약 새미에게 연락이 온다면 뭐라고 얘기해야 할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해 고민이 깊어진다. 



*대문 사진, 우리 동네 사립학교, 출처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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