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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Apr 27. 2024

엄마, 왜 동생만 예뻐하세요?

엄마는 버릇처럼 말했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너는 나의 남편이자 친구 같은 존재야."

어릴 때는 그 말이, 우리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만들어 주는 마법의 주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가 떠날까 봐 두려웠던 나는, 그녀가 내게 더 의지하길 바라 눈 밖에 날까 모든 욕망과 소망을 숨긴 채 엄마의 꼭두각시로만 존재했다. '나'를 잊고 사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죽음을 떠올리자 깨닫게 되었다. 천만 다행히도 남편을 만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주체성을 회복해 갈수록 엄마에게 나는 점점 눈엣가시인 딸이 되어갔다.


2015년 가을, 한국으로 귀국해 정착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우리는 다 같이 가족사진을 찍자는 친정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주말 하루를 반납하고 사진관으로 향했다. 부모님, 동생 내외와 조카, 우리 부부와 아들, 그렇게 세 가족은 어느 전원주택을 스튜디오로 개조한 사진관에 모여 네다섯 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실내와 정원을 오가며 수천 장의 사진을 찍었다. 가족별, 성별, 장모와 사위들, 아빠와 딸들, 손자들, 각각 주제에 맞게 의상도 바꿔 입어가며 피곤한 촬영을 이어갔다. '자, 엄마와 딸들 오세요'라는 사진작가의 요구에, 엄마와 동생과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어머니, 하나, 둘, 셋에 더 예뻐하는 딸 쪽으로 고개 돌립니다, 자, "

라는 사진작가의 말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엄마. 그러자 사진을 몇 장 찍던 작가가 말했다.

"와, 보통 고개를 이리 돌렸다 저리 보고 하시는데, 이 어머님은 단호하시네, 큰 따님 쪽은 한 번도 안 돌아보세요? 우리 첫째 딸, 엄마한테 뭐 크게 잘못한 거 있어요?"

농담을 진심으로 받은 엄마 때문에 당황한 사진작가가 개그로 분위기를 전환하려 노력했지만 동생 쪽으로 돌려진 고개는 단 한순간도 내 쪽을 향하지 않았다. 엄마의 뒤통수만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른 채 촬영은 계속됐다. 어떻게 하면 내게 상처 줄지 잘 아는 엄마는, 그렇게 나를 투명인간 취급 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사랑스러운 남편과 아이를 위해 속없이 웃고 또 웃으며 촬영을 마쳤다. 그렇게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내가 사진 속에 남았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가족의 '엄마'로 기능했다. 엄마의 사랑이 필요했던 엄마는 나를 자신의 엄마로 길렀다. 받은 사랑이 없었지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마음을 나눠줘야 했다. 엄마는, 살면서 겪은 모든 고통과 분노와 불안을 내게 토해내었고 스스로는 점점 가벼워졌다.


어린 딸에게 부모와 같은 아량과 인내를 기대한 엄마 덕분에 난 예닐곱 살에 이미 철이 들었고, 두 살 터울의 동생을 마치 딸을 아끼는 마음으로 보살폈다. 누군가를 걱정하고 아꼈던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아직도 난 가끔씩 (위험한 순간에) 아들의 이름을 동생의 이름으로 바꿔 부를 때가 있다.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무조건 사랑한 존재, 그녀가 다칠까 봐 내가 대신 날아오는 모든 돌을 맞아도 좋겠다고 생각한 존재, 엄마가 떠나도 내가 돌봐야 했던 존재, 나는 못 받은 내리사랑을 그녀에게만큼은 부족함 없이 주고 싶었던 한없이 소중한 존재.


나는 동생과 특별히 가깝다.


내가 더 이상 엄마의 말에 복종하지 않자, 엄마는 동생에게 눈을 돌렸다. 성격이 강하고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는 동생은, 엄마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비교적 잘 지냈다. 엄마가 무서워 눈치 보며 굽신거리던 나와는 대조적인 태도였지만, 엄마는 나를 내치기 위해 그런 동생을 더욱 편애했다. 나와 동생 사이에 이간질도 하고 유리한 위치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지만,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동생을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흡수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들 사이의 다이내믹이 무엇이든, 엄마에 대한 마음을 접고 동생을 통해 소식을 듣고 지내는 지금, 과거보다 훨씬 행복하고 편안하다고 느낀다. 나도 동생이 너무 좋으니, 엄마가 그녀를 예뻐하는 마음은 백분 이해한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느끼는 감정이 다 다르듯, 부모 역시 자식들에게 품는 마음이 다를 수 있겠지. 다만, 엄마가 차별을 표현하는 방식이 잔인하고 유치해서,  슬프다. 부모가 좋은 어른이 아니라는 생각은 내 자존감에 상처를 낸다. 뿌리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실망감, 인격적으로 본받고 싶은 사람이 부모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


사랑이 넘치는 시어머니도 편애를 하신다. 그녀에게 큰 딸(줄리)은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모유를 거부해 말라가는 딸에게 분유 수유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시작'은 어머니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비명을 지르듯 울어대는 딸이 너무나 힘들어 매일 울고 싶으셨다는 어머니. 대여섯 살이 되자 집안이 너무 더럽다며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 어머니를 돕기 시작한 딸은 그렇게 OCD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태어난 둘째(남편)는, 놓아둔 자세 그대로 방글방글 웃으면서 한두 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는 아기였다(그래서인가, 지금도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는 게). 아버님의 톡 쏘는 말투를 이어받고 어마어마한 sarcasm을 장착한 채 대화하는 딸은, 농담을 하면서도 어머니께 상처를 준다. 내가 듣기엔 재치 있고 영리한 유머인데, 비아냥의 대상이 되는 어머님은 그녀의 농담(대부분은 집안에 쌓여있는 잡동사니에 관한 것들 혹은 초콜릿 중독자인 어머니의 얼굴이나 옷에 묻은 초콜릿에 관련된 것들) 불편해하신다. 열여덟 살이 되며 독립한 딸은, '내가 엄마아빠와 다시 살게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라고 했다. 갈등이 있거나 싸워서 한 말은 아니었다. 정리벽, 결벽증 환자인 큰 딸이 호더스인 부모의 집을 떠나며 했던, 일종의 '선언'이었을 뿐이다. 반면 남편은 어릴 때부터, '내가 돈 벌면 옆집을 사서 평생 엄마아빠 에서 살 거야'라는 말을 해왔다고 한다. 바로 옆집은 아니지만 5분 거리에 살면서 얼떨결에 그 약속을 지키게 된 아들. 우리가 곁에 살기 시작하면서, 시부모님은 생의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그렇게 더 예쁜 자식은 예쁜 말만 하다가 행복을 실현해 주는 존재가 되었다.


며칠 전 줄리가 어머니께, '엄마는 둘째를 더 특별하게 생각하니까'라고 말했는데, 객관적인 의견을 듣고 싶으셨던 어머니께서 어제 내게 의견을 물으셨다.

"어렸을 때는 안 봐서 모르겠지만, 제가 가족이 된 이후의 상황만 보면, 어머님이 남편을 더 예뻐하시긴 해요. 줄리가 더 많이 노력하는 자식인데, 어머님의 사랑은 늘 아들 쪽을 향하고 있거든요. 같은 사랑을 받기 위해 줄리가 하는 노력이 100이라면, 제 느낌상 남편은 10도 안 하는 것 같은데 더 많은 사랑을 받아요."

옆에서 그 말을 듣던 남편이 말했다.

"그건, 내가 그냥 사랑스러워서가 아닐까?"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쳐다보니, 농담이 아닌 듯 진지한 표정이다. 그와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그래, 사랑스러워서 좋겠다'라고 말한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께서 줄리를 많이 사랑하시지만, 성격이 많이 다르고 줄리가 요구하는 부분(청결과 정리)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 불편하신 게 아닐까요? 줄리가 온다고 하면 긴장하시잖아요. 집도 평소보다 깔끔하게 치우려고 에너지를 과하게 쓰시고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깜짝 놀라며 말씀하셨다.

"스티브(줄리의 남편)도 그 말을 해줬다는구나. 내가 긴장해서 불편한 거라고.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닌데, 잘 안 맞아서 같이 있을 때 약간의 텐션이 있는 거라고. 내가 믿는 두 사람이 그렇게 얘기해 주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말해줘서 고마워."


내게 자식이 한 명 더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까다롭지 않고 설명만 잘해 주면 선뜻 동의하는 아들을 키우다가, 예민하고 모든 제안에 No를 외치는 어려운 자식이 태어났다면, 나는 그 아이를 덜 예뻐했을까. 마음가짐이 달랐을 수 있겠지, 더 섬세하게 접근해 아이의 표현뒤에 숨겨진 의미와 감정을 읽어보려고 더 많이 노력했을 수 있겠지, 까탈스러운 요구를 더 많이 수용해 주려고 애썼겠지, 그러다 지쳐서 너무 힘들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부모인데, 더 힘들다고 덜 예뻤을까. 아니, 부모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는 걸까. 아이들을 대하는 감정과 태도가 각각 다를 수는 있겠지만, 덜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


친정엄마의 태도를 보면, 나를 덜 사랑한다는(어쩌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다. 한 때 엄마가 나를 더 사랑한다고 느꼈던 시간 동안, 나는 엄마의 불안과 통제를 꾸역꾸역 다 받아먹었다. 그래서 많이 아팠고, 더 이상 쓰레기통으로 살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겨우 내 삶을 찾아가려 애썼더니, 엄마는 나에 대한 사랑을 철저히 철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젠 괜찮다. 어떻게 부모가 그럴 수 있어,라고 분노하기엔 나도 나이가 많이 들었고, 여러 풍파를 겪으며 이 자리에까지 왔기 때문에 '부모도 사람이고 많은 결핍이 있을 수 있으며, 모든 부모가 다 어른스러운 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가 주지 않은 안전한 사랑은 남편이 채워줬기에, 내 아이에게 가는 사랑은 건강하고 튼튼할 것이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이제 와서 '엄만 왜 동생만 예뻐하세요?'라고 묻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엄마의 사랑을 갈구할 때나 궁금했고 하고 싶었던 질문이다.


아주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해 봤다.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그럼 나는, 고집스럽고 욕심 많고 신경질적인 딸을 케어하느라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많이 사랑해 줬을 거다. 갈등이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불안을 건드리지 않을 만큼, 깊고 단단하고 충분한 사랑을 줬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엄마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평생 만족하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사는 삶이 아닌, 가족들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훨씬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직은 이해해 주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마음 한 편이 말랑해지려고 한다. 엄마의 불행이 내 탓인 것만 같았던 죄책감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계속 가벼워지고 편안해져서, 언젠가는 엄마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대문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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