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고양이 한 마리가 정원에서 나를 기웃거렸다. 내가 주방에 있을 때면,내 눈높이와 같은 정원 울타리 위에 앉아 나의 움직임을 쫓으며 나를 관찰했다. 어느 숏폼에서 고양이와 대화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야옹, 미야오'와 같은 소리가 아닌 태국어 같은 소리로 고양이를 부르고 있었다. 영상 속 고양이는 신기하게도 부름에 응답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하루는 번득 그 생각이 나서, 주방 문을 열고 '멕악' 같은 희한한 소리를 내 봤다. 그랬더니 이 고양이가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아... 이건 너무 예상밖인데?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어떡하지?' 그러는 사이, 이미 고양이는 집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멕악'이 들어오라는 소리였을까?
계획에 없던 서먹한 대면. 덜컥 남의 집에 들어와 버린 그 고양이도 순간 내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주방을 한 바퀴 돌더니 냉장고 앞에 멈춰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를 향해 야옹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관계를 시작해 준 게 고마워, 나 역시 작은 새우 다섯 마리로 화답했다.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됐다.
내향인인 나는 동물에게도 할애할 에너지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함께하는 시간이 5분 이상 지속되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특히 이 고양이는 나의 주의를 끌기 위해 끊임없이 야옹거리는 수다쟁이에다가 내가 앉아 있으면 무릎에 올라오고 서 있으면 다리에 찰싹 붙어 퍼링을 하며 몸을 비벼대는데,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개냥이에 가까워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볼 수 있다. 나와 친해진 고양이는 남편과 아들도 무서워하지 않고 그들과의 첫 대면에 발라당 누워 배를 까고 애교를 떨었다. 극 E의 세 생명체(남편, 아들, 고양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내가 '이제 그만 놀 시간이야'라고 소리치면 아쉬워하며 각자 흩어진다. 어느 날부터인가, 고양이를 안아서 내보내지 않으면 돌아가라고 문을 열어줘도 나가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시부모님께 해 드렸더니, 사랑이 넘치시는 어머니께서는,
"아이, 예쁘겠다, 장난을 많이 치는 걸 보면 어린가?"
라고 물으셨는데, 아버님은,
"오, 저런, 그 고양이가 너희를 새로운 주인으로 삼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라며 걱정을 하셨다.
은퇴 후 아버님의 삶에서 동물은 늘 골칫거리였다. 예전에 한 관광객이 말을 타고 동네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는데, 아버님댁 드라이브웨이 가까이에서 말이 똥을 쌌다. 그런데 그 관광객이 그걸 수습하지 않고 도망가버려 아버님께서 힘들게 치우고 청소를 하셔야 했다. 코로나 시기, 그레이트 옴(동네에서 가장 높은 산)에 살던 산양들이 인적이 드문 타운으로 내려와 휘젓고 다니다 아버님댁 정원의 풀을 다 뜯어먹어 더벅머리를 만들어놨었다. 코로나는 종식됐지만, 그 산양들은 아직도 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떼 지어 타운을 돌아다니며 훌리건처럼 사람들의 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아버님 댁의 뒷마당은 양과 젖소를 키우는 큰 농장의 필드와 담을 두고 붙어 있는데, 젖소들이 좋아하는 사과나무가 하필 시댁 뒷마당에 있었다. 두 그루의 사과나무 중, 요리용이라 맛이 없던 한 그루는 살아남았고, 다른 하나는 맛있는 사과가 열리는 나무였는데 해마다 달콤한 사과나무를 뜯어먹던 젖소들 때문에 그나무는 더 이상 크지 못했고, 결국 뿌리째 들어내야 했다. 아버님께서는 베리류를 좋아하셔서 뒷마당에 라즈베리와 블랙베리 나무를 심으셨는데, 익기가 무섭게 새들이 따먹어 수확기간이 되면 새와 전쟁을 벌이신다. 한 때 달콤한 밤이 열리던 밤나무도 있었지만, 맛있는 밤이라 소문이 난 건지 온 동네 다람쥐들이 몰려와 잘 익은 밤을 모두 수확해 갔다.
아버님께 동물은, 일용할 양식을 축내는 외부의 침입자 혹은 같은 음식(한정된 자원)을 두고 겨루는 경쟁자와도 같았다. 그러니, 우리의 음식을 공짜로 얻어먹으러 온 것 같은 고양이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쁘다고 무조건 받아줄게 아니야. 새우를 주기 전에 진지하게 잘 생각해 봐. 정말 그 고양이가 너희 집에 눌러앉으면, 그때부터 돈이 얼마나 들겠니?"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막상 아버님께서도 집에 오는 동물을 적극적으로 막거나 집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예방조치를 취하신 적은 없다. 농장 주인과 상의해 사과나무 주변에 울타리를 하나 더 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고, 허수아비를 놓아 새를 겁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오히려,
"새들이 나보다 일찍 일어나고 다람쥐들은 나보다 부지런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더 일찍 일어나야 되는데, 그러기엔 내 체력에 한계가 있어."
라며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우리 집에 매일 놀러 오는 고양이에 대한 걱정을 하시며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고양이를 키우다가 아프거나 병이 들면 정말큰일이지.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겠니, 큰 책임이니 잘 생각해야 한다."
결국은 생명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함께 하는 '책임감'에 대해 강조하고 싶으셨던 아버님. 우리는 애완동물을 키울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아버님을 안심시켜 드렸다. 일 년에 적어도 2개월 정도는 집을 떠나 여행을 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식구와도 같을 애완동물을 어디에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단 말인가.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는 이유다.
띵동.
저녁을 준비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나가보니, 같은 단지 내 사는 이웃이었다. 고양이가 집에 안 들어온 지 오래되어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끔씩며칠 정도외박을 한 적은 있어도 일주일 넘게 집에 돌아오지 않은 적은 처음이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앗,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고양이와 너무나 닮았다. 하지만, 전단지에도 나와 있듯이단지 내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가 한 마리 더 있다. 내 휴대전화 속 앨범을 열어 그녀에게사진을 보여주니자신의 고양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전단지를 통해, 우리 집에 놀러 오던 아이는 하우스 30의 고양이였음이 밝혀졌다. 이제 어디 사는지 알게 됐으니 집에 안 가고 버티면 그 집에 데려다줄 수 있다.
왼쪽은 잃어버린 고양이, 오른쪽은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고양이
동물이 함께 하는 삶은 비현실적인 재미와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준다. 산책하다 만나는 야생마들, 도로에 돌아다니는 산양들, 사람 손위에 올라와 먹이를 먹는 야생 새들, 남의 집에 불쑥 셀프 초대로 들어와 자기 집에 안 가는 고양이까지. 관광 타운이지만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고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살다 보니 가끔씩 이런 행운 같은 만남이 마법처럼 찾아온다. 행복이 별 건가, 이런 순간들이 모이면 그게 바로 삶의 기쁨이자 만족인거지.
산책하다 만난 야생마들. 우리 옆을 지나가시던 할머니께서 말을 걸자 말이 다가온다.
내 손 위에 올라와 먹이를 먹는 야생 로빈(로빈 출몰 빈도가 잦은 곳이라 새 모이를 준비해 감)
눈이 와도 말 타고 다니는 사람들(똥 싸면 어쩌죠?)
훌리건 산양들 때문에 도로 양방향 모두 운행 정지 상태(하필 우리 차 앞에서...)
코로나 때 타운을 덮친 산양들에 대한 뉴스 기사(출처, 좌 BBC 우 The Guardian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