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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끝나고, 내가 시작됐다

이혼 D+60

by 유해나

이혼 후, 잠시나마 쌓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질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안정된 가정,
포근한 공간,
다정한 남편,
그리고 미래의 귀여운 아이까지—


이 모든 것이 사라질 거라는 현실이 너무나 슬펐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지만,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착각했던 하나의 미래가 완전히 지워졌다.


하지만 이대로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새하얀 도화지에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미래를 그려가야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싱글 버킷리스트 만들기 였다. 오랫동안 꿈꿔왔지만 상대방이 있기에 어려웠던 일들, 예를 들면 외국 생활 같은 것들로 목록을 채워갔다.


나는 원래 역마살이 강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한 직장이나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면 몸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니 이동하려면 상대방까지 고려해야 해서 쉽지 않았다. 안정과 자유는 반비례 관계였다. 결혼 생활은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지만, 반대로 자유로운 성향은 억눌러야 했다.


이제 다시 혼자가 되었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머물고 싶으면 머물 수 있었다. 다시 찾은 자유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외국 어학연수 3개월 가기

-30대 안에 6대륙 모두 밟아보기

-전국 팔도 살아보기


이혼 후 버킷리스트에 새롭게 추가된 목록이다. 실현 가능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선택의 자유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후련한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혼 / 비혼 / 재혼 등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이 담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회에서는 부모-자녀로 이루어진 가정만을 "정상가족"이라고 간주하지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었다.


혼자 사는 비혼주의는 물론, 결혼은 안 했지만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사람, 연예인 사유리처럼 비혼 출산을 한 사람,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하지 않고 몇십 년 동안 연애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하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반드시 결혼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그중에서 나의 성향에 가장 잘 맞는 방식은 무엇일지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결혼이 주는 구속은 싫지만,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원하는 나에게는 결혼하지 않고 연애만 하는 삶이나,

법적 보호자와 같은 현실적인 이유로 느지막이 혼인신고만 하고 딩크로 사는 삶이 현재로서는 가장 적합해 보였다.




이렇게 삶의 밑바탕을 대략적으로 스케치하고, 일상적으로는 1년간 돈 아끼지 않고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기를 시작했다.


과거의 나는 짠순이였다. 대학생 때부터 열심히 알바하고, 취업 후에도 투잡을 뛰면서 알뜰살뜰 저축했다. 그렇게 모인 종잣돈으로는 투자를 하면서 돈을 불렸다. 나이에 비해 꽤나 많이 모은 돈은 고스란히 결혼 자금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혼하고 나니 허무함이 몰려왔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아끼고 모았던가? 결혼해서는 내 돈이 나만의 돈이 아니라 공동 자금이었기에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으니, 내가 번 돈을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고 싶은 것은 원 없이 배우고 -미술, 플라워, 악기, 운동- 사고 싶은 것도 마음껏 샀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날 때면 달콤한 디저트를 선물했고, 가족들과 식사 자리에서도 내가 밥을 샀다.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끼지 않고 돈을 쓰니 정말 행복했다. 이게 바로 돈 버는 맛이구나!


이런 생활이 몇년간 지속된다면 문제가 될수도 있지만, 1년의 자유를 주고 그 이후엔 다시 짠순이로 돌아가기로 했다. 빌라가 아닌 아파트 월세를 선택했을 때처럼, 지금은 돈 모으기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치유해주는게 우선이었으니까.


딱 1년간 허락된 소비의 자유 덕분에 아끼고 절약했던 이혼 전보다 행복도가 높아졌다. 결혼이 끝나고, 오롯이 '나'로써 존재하는 인생 2막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쁘고 행복하게 살다가도 순간순간 외로움과 공허한 느낌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혼자 사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외로움을 잘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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