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02
이별 후 닷새라는 시간이 흘렀다.
태민이라는 조각이 빠져나간 유영의 시간들은 지극히 평범했다. 더 이상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답답함이나 울렁임도 없었다. 태민과의 기억의 편린에서 헤매기에 유영은 너무 바빴다.
‘애초에 그 사람이 나의 일부였던 적이 있기는 할까?‘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완벽하게 복구되는 스스로를 보면서, 유영은 이별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 이별은 유난스럽지 않았고 특별히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으며 묘한 적막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끝을 고하면서도 별다른 슬픔이나 아픔을 느끼지 못했던, 느끼는 것이라곤 못할 짓을 하는 듯한 죄책감 뿐이었던, 그런 퍼석한 스스로를 떠올렸다. 그건 마치 싱그러움이 날아간 마른 낙엽 같았다.
‘별로 사랑하지 않았는 지도 모르겠어.’
소중했던 감정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며 자신을 책망하는 일은,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가장 값싸고 비겁한 해결책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좋지 않은 멍청한 방법이라는 것도 잘(아마도) 알았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은 냉혈한이 되기는 싫었다. 유영은 그냥 나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게 편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아침 저녁으로 쌀쌀함이 느껴졌다. 여느 평범한 목요일, 유영은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옷장에서 코발트 블루 빛깔의 머플러를 꺼내 목에 둘둘 말고 올려 묶은 머리의 잔머리를 정리했다. 머플러를 톡톡 두드리며 그녀는 거울속 스스로를 응시했다. 올해는 가을이 다 가기도 전부터 어깨와 목이 시린 느낌이 들었다.
'오빠랑 사귈 때도 아렇게 추웠나?‘
작년 날씨가 어땠는지 떠올리며 유영은 가죽 자켓을 걸치고 끈이 긴 검은색 백팩을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유영의 발걸음은 손목 위의 시간을 확인한 뒤 조금 더 빨라졌다. 남색 컨버스를 신은 유영의 다리가 반질거리는 구두들 사이로 빠르게 교차했다. 커피를 사고 자료를 정리해서 회의에 가면 분명... 빠듯하다. 유영은 신호를 기다리며 한숨을 쉬었다. 입김이 나올 것 같은 날씨였다.
“유영님 내일 3시에 콜 돼요?”
“네 그럼요! 인비 주세요.”
“보냈어요. 그리고 저 퇴근할건데 같이 가실래요? 남자친구가 데릴러 온댔는데.”
“아유 됐어요 효진님, 민폐야 민폐.“
“약간 그렇긴 해”
“이렇게 내팽개칠거면 왜 물어봤어요?”
사무실에는 같은 팀메이트인 효진과 자신뿐이었다. 유영과 나이대가 비슷한 효진은 함께 도쿄부를 담당하고 있는 PM이었다. 나이대가 가까운 만큼 둘은 업무 외적으로 가까웠고 서로에게 의지했다. 그것과 별개로 지금은 효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신규 프로젝트를 자원한 스스로가 잠시 원망스러워졌다.
‘내가 왜 그랬지?’
모니터 시계가 앞자리를 21로 띄웠다. 벌써 9시라고? 유영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미간을 꾸욱 눌렀다. 커피를 마시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라, 결국 책상 위에 놓인 아몬드 사탕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 살찌겠다.
“유영님 저 먼저 가요! 얼른 들어가세요.“
“네 들어가세요 효진님!“
효진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살짝 일어난 유영은 어느새 사무실에 혼자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신자들! 목요일 밤에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문득 슬퍼져 유영도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가방에 노트북과 메모지가 잔뜩 붙은 다이어리, 펜을 넣고 다시 푸른색 머플러를 둘렀다. 자켓을 챙겨 입고 어두운 로비로 나와 휴대폰을 확인했다.
[효진] 유영님 빨리 집에 가요. 데이트라도 하든지.
아, 열받아.
남자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런 장난을 치는 사람은 효진밖에 없었다. 올 여름 유영이 이별한 후 효진은 호시탐탐 유영을 놀릴 기회만 노렸다. 장난기 많은 팀 내에서도 효진은 단연 1위였다. 유영 놀리기 대회가 있다면 효진은 올림픽 챔피언이었다.
[유영] 소개라도 해주면서 데이트를 추천하시는 것은 어떨런지요?^^ 솔로는 집에라도 갈게요.
유영은 큭큭 웃으며 엘리베이터 1층을 눌렀다.
답장을 보내고 나니 한 층 한 층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의 적막이 느껴졌다. 1층에 도착한 유영은 머플러에 코까지 얼굴을 푹 묻은 채 로비 문을 힘껏 당겼다. 찬바람이 뻥 뚫린 가슴 속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영은 몸을 잔뜩 웅크린채 잰걸음으로 걸었다. 내일 미팅 일정을 생각하면, 또 회사에 나와야 한다. 대체 재택이 있는데 왜 쓰지를 못할까? 오늘만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며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유영은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했다. 7분이면 나름 선방했다.
'전태민은 잘 사나.‘
습관적으로 기억 속에서 태민이 재생되었다. 별로 궁금한건 아니었다. 외롭지도, 그립지도 않았다. 이건 분명 지난 사람에 대한 예의와 잔상같은 것이었다. 헤어짐은 분명 옳은 선택이었다. 다만 유영은 비겁하게 생각하기를 포기했던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바깥 풍경 대신 흰 줄 이어폰을 끼고 푸른 머플러를 맨 스스로가 보였다.
‘그치만 너무 많이 생각하기에는 나 살기도 버거운걸.’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확실히 올해는 예년보다 더 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