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01
해가 짧아지고 있다.
음력일을 체크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코 끝을 간질이는 옅은 가을 냄새와 약간은 외로운 느낌이 여름의 끝을 알렸다. 숨을 크게 들이 쉬면 이제는 눅진하지 않은 공기가 느껴진다. 아마 시원하다는 감각이다.
"유영아."
유영은 뒤를 돌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살핀다. 그래도 아직은 더운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는 태민이 보인다. 그러나 그를 충분히 기다리지 않고 다시 앞으로 걸어나간다. 어슴푸레 길가를 비추는 조도 낮은 가로등과, 풀벌레 소리가 아직 여름임을 알린다. 응, 하고 짤막한 대답을 남긴 채 유영은 대화를 이어나가는 대신 혼자 생각하기를 택한다.
'그래, 아직도 여름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태민과의 연애는 처음부터 안정적이었고, 편안했고, 유영을 당황하지 않게 했다. 태민은 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었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면서 유영을 마음 아프게 한 적도 없었다. 피를 보는 대화같은 것도 없었고, 흔들리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태민은 한결같이 다정했고 유영만을 바라봐줬다. 그리고 유영은 그게 싫었다.
이런 생각에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것은 여름의 초입이었다. 매미가 울기 전부터, 유영은 태민과 함께 있을 때면 늘 왠지 모를 불편을 느꼈다.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서 별 말이 필요없던 초반과는 다르게 이제는 밀도 있는 대화가 필요했는데, 둘의 대화는 일정한 주기로 톡톡 끊겼고 점도도 부족했다.
유영은 잔잔하고 얕은 대화에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다정한 애정을 한 몸에 받으면서 권태를 느끼는 스스로가 싫었지만, 밀려오는 목마름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와 달리 태민은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무언가 잘못 됐다고 느낀 유영은 여름 내내 태민에게 말을 걸었다. 테스트일지도 모를 이런저런 질문들은 어쩌면 굉장히 뻔했고, 또 고전적이었다. 궁금했던 것은 어쩌면 연애 초반에나 하는 질문으로도 두 사람이 즐겁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지였다.
"요즘 어떤 걸 할 때 가장 즐거워?"
"공부는 잘 되어가?"
"최근에 고민같은 거 있어?"
질의 응답을 통해 깨달은 것은 태민이 굉장히 평평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2차원과 3차원 중 굳이 한 가지를 골라야 한다면 태민은 2차원이었다.
축구, 응, 별로 없는 것 같아. 그의 대답은 늘 몇 초면 충분했다. 입체적이지 않고 간결한 태민의 삶과 화법을 보고 있자면 유영은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꼈다.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태민의 답변이 밉기도 했다가, 되려 혼자만 고민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억울하기도 했다. 진정한 관계라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면서 시작되는 거라고 하던데. 2차원인 태민의 세상은 3차원인 유영의 세상과 부딪치는 법이 없었다. 가을을 앞둔 어느 날, 태민과 산책하던 유영은 문득 깨달았다.
'아,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겠구나.'
매미 소리와 옅은 어둠이 서서히 강변을 덮었다. 아직은 습기를 품은 미지근한 저녁 공기가 두 사람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와 풀벌레 울음소리가 뒤섞여 청각을 예민하게 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유영에게 이상함을 느낀 태민이 다가왔다. 이야기해야만 했다. 유영은 숨을 크게 들이 쉬고 어느새 한 발자국 뒤까지 다가온 태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빠 우리 그만 헤어지자."
그렇게 하게 해줘.
태민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서렸다. 그의 눈동자는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해 위아래로 흔들리다가 이윽고 당황으로 젖었다. 왜냐고, 아무 문제 없지 않았느냐고 유영에게 당장 물어보고 싶지만 입꼬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태민을 유영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 사슴이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듯,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그녀에게 보였다. 유영은 어린 짐승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어깨부터 목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의 느낌을 간신히 견뎌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중인 소년 앞에 여자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하아."
유영은 집으로 돌아와 발목이 짧은 남색 컨버스를 벗고 곧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땀에 젖은 얇은 흰 티가 몸에 끈적하게 붙어 벗겨내기 어려웠다. 그녀는 통이 넓은 청색 반바지와 갈색 발목 양말을 마저 벗고 그대로 거울 앞에 섰다. 적나라한 백색등 아래 선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더 잔인해 보였다.
'아니야, 언젠가는 정리해야 했어.'
유영은 스스로 되뇌이며 샤워기의 물줄기를 세게 틀었다. 물줄기 소리를 뚫고 떨리던 태민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것만 같았다. 눈을 감으면 다시 사슴같던 그의 눈망울이 생각날까봐, 머리를 감으면서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유영은 몇 번이고 몸을 닦았다. 땀과 함께 아까의 장면이 모두 씻겨 내려가길 바랐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금 이별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한 스스로가 싫었고, 큰 반항이나 질문 없이 눈물만 흘리던 태민도 싫었다. 아직은 끈적한 여름 공기에 젖은 티셔츠가 벗겨지지 않는 감각도 싫었고 줄어들기 시작한 일조량도 싫었다. 하필 이별할 때에 마주해버린 아름다운 땅거미도 싫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최악이었던 것은, 누군가는 간절히 바랄 안정과 애정에 사치스럽게 권태를 느끼는 스스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