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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터 Jun 26. 2024

고립과 사랑

청년 '쉬었음' 다큐를 보고

얼마 전 '쉬었음‘ 청년들에 대한 추적 60분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오랜 기간 일과 구직 활동을 하지 않는 20-30대들의 이야기였다. 기억에 남는 한 전문가가 한 말이, 지연과 학연 등이 끈끈했던 이전 세대들은 주변인들과 함께 힘들어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오늘날의 청년들은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것이 큰 사회 문제라고 했다.


다큐에서 말하길 고립의 전 단계는 이중생활이라고 한다. 밖에서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정상적인 척하느라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집에 돌아와 한층 더 깊은 우울감에 빠지는 거다. 이 부분에서 우울했던 나의 20대가 떠올랐다.


주입식 교육에 뼛속까지 세뇌된 나는 매우 불만족스럽고 우울한 학창시기를 보냈다. 한국인 특성인 '행복 지연 능력'을 온몸으로 체득해서 성인이 되면 행복한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스무 살이 되자마자 즉각 행복은 찾아오지 않았고 그때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부모님께 다니던 학교를 관두고 싶다고 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부모님은 크게 놀라시며 반대하셨다. 취업은 어디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부모님께 뾰족한 계획이 없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생 부모님의 결정에 모든 걸 맡겨오다가 갑자기 길을 잃은 것 같았다.


© 2012 버터


내면은 혼란스러웠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밝은 척을 하면서 몇 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 힘들어졌다. 취업을 하기도 하고, 인도나 네팔로 배낭여행을 떠나거나 사업을 하면서 도전하는 친구들을 보니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는 나 자신이 점점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주위 관계를 하나씩 끊어내고 외부와 접촉을 최소화한 채 원룸에서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 휴학을 오래 하면서 퇴학 처리되기 직전에 자퇴서를 제출했고, 몇 년 뒤에 다시 재입학을 하는 등 학생도 백수도 아닌 기간이 8년 동안 지속됐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면서 든 생각은 나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기성세대가 강요한 허황된 가치를 나의 꿈이라 믿으면서 더 이상 나의 행복을 지연하고 싶지 않았다. 또 성인이 되어 가족 밖의 세상을 경험하면서 내 안의 사랑의 부재를 깨달았다. 자라온 환경에서 부모님 또는 조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처럼 그때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사랑에 관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으며 내가 철학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관심사가 생기니 신이 나고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철학 잡지를 구독하는 등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아주 쉬운 것부터 하기 시작했다.


© 2020 버터


현재 프리랜서로 일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나는 여전히 '쉬었음' 청년이다. 작년에 인턴쉽을 마친 이후로 반년 간 일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여행을 다녀오고, 강의를 듣고, 심리 상담을 받고, 이사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움직였다. 새로 이사한 집은 오래된 건물이라 장마철이 시작되자마자 바퀴벌레가 보였다. 효과가 좋다는 바퀴벌레 약을 두세 개 사다가 여기저기 뿌려놓고 다음날 대청소를 했더니 그 뒤로 바퀴는 자취를 감췄다. 몇 년 전 무기력한 채로 죽은 바퀴 시체가 나뒹구는 원룸에서 청소할 의지조차 없이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던 때가 떠올랐다.


비록 과정은 느리고 길었지만 오랜 고립의 경험이 나를 서서히 바꿨다. 그러나 언젠가 또 출몰할 바퀴벌레처럼 무기력함과 우울함은 불쑥불쑥 찾아올 것이다. 이건 우리의 뇌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신호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경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사랑과 같은 것들이 존재하기에.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비슷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이 고립을 통해서 사랑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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