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진가는 뉴욕 밖에 있다 14. Auburn, Oswego
"뉴욕, " "자유, " 하면 아마 대부분은 뉴욕 맨해튼 남쪽, 리버티 아일랜드에 위치한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리실 것이다. 나 조차도 뉴욕의 진가는 뉴욕 밖에 있다 매거진 로고 디자인도 자유의 여신상을 모티브로 했으니 뉴욕과 자유의 여신상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 하겠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인종갈등뿐 아니라 전 세계 역사에서 인종차별을 피해 목숨을 걸고 도망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뉴욕 주에서 자유를 찾은 곳은 따로 있다. 오늘 소개할 Auburn 그리고 Oswego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을 외쳤던 3.1절을 기념해 뉴욕 주에서 목숨을 걸고 인종 차별로부터 독립을 외친 사람들의 이야기,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때는 1820년대, 미국 남부의 백인 농장 주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배로 싣고 온 흑인들을 사고팔아 노예로 삼고 일을 시키던 때였다. Harriet Tubman도 흑인 노예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태생이 노예이고, 앞으로 올 미래도 노예일 운명을 가진 "노예 수저" 출신 흑인 여성이었다.
자유를 찾아 탈출하고자 하는 노예에게는 당연히 벌이 내려졌다. 어느 날 탈출에 실패한 동료 노예가 맞고 있는 것을 본 해리엇 텁맨은 주인을 막다가 1kg 자리 물건을 대신 맞았고 이로 인해 평생 심각한 두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해리엇 텁맨은 지속해서 자유를 갈망했고, 그녀의 백인 주인이 죽어 다시 한번 팔릴 신세가 되자 "지금이 좋다"는 남편을 두고 홀로 미국의 북쪽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탈출한 노예를 붙잡고 되팔아 이득을 취하는 "slave catcher"들을 피해 꼬박 걸어도 3주 하고도 5일이 걸리는 145km의 거리를 그녀는 밤마다 움직여 메릴랜드-델라웨어-펜실베이니아를 거쳐 자유를 얻고야 만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뉴욕 주 중앙에 위치한 Auburn을 거점으로 그녀는 10년 동안 미국의 남쪽과 북쪽을 19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약 300여 명의 흑인 노예들을 지하 철도를 활용해 탈출시켰다. 수십 번의 여행 그리고 수백 명의 탈출을 돕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명의 "지하 철도 승객"을 놓치지 않고 모두 자유를 누리도록 도운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300여 명의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는 동안, 막상 그녀 자신은 1850년에 $40,000, 2020년 기준 약 백만 불 달러의 현상금이 걸린 현상수배범이 되고야 만다.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까지 노예들을 해방시키느라 남쪽과 북쪽을 잇는 지리적 정보에 그 누구보다 통달하게 된 그녀는 이후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북 연합군을 도와 정보를 전달하는 스파이 역할을 하기도 하고, 군인들을 치료하는 간호사의 역할을 하며 연합군의 승리를 도운다.
그 누구보다 치열한 일생을 보낸 그녀는 흑인들이 자유를 얻게 된 이후에도 뉴욕 주 Auburn (어번)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노인들을 케어하며 노후를 보내고, 1913년에 생을 마감한다.
해리엇 텁맨의 집은 현재 공사 중이라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만 지나가며 볼 수 있다. 예전에 지어진 집이고, 해리엇 텁맨 하우스는 전혀 크지 않고 또한 외관도 멋있지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 그녀가 머문 곳이기에 그 어떤 값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을 본다.
해리엇 텁맨이 하늘에서 영원한 자유를 얻은 지 30년이 흐른 1944년,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나치의 '인종청소' 타깃이 되고 만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Franklin D. Roosevelt 은 유럽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 중 982명이 미국에 거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함께 오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과 인종 학살로부터 자유하게 된 대에 대한 감사함이 공존했을 그들은 뉴욕 주 온타리오 호수 바로 밑에 위치한 Oswego 지역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오스위고 (영어 발음: 오스위고, 한글 표기: 오스웨고) 지역에는 미국과 캐나다의 경계가 되는 온타리오 호수 (Ontario)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상 온타리오 요새 (Fort Ontario)가 세워졌는데, 바로 이곳에 유대인들이 2년간 임시로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그들의 살았던 흔적 및 홀로코스트 역사는 온타리오 요새 근처 Safe Haven Holocaust Refugee Museum에 보관 및 기록되어 있다.
현재 포트 온타리오는 안에는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 났지만, 요새를 둘러싸고 산책로가 펼쳐져 있어 날씨가 좋은 날 온타리오 호수를 보며 잠깐 걷기에 좋다. 특히, 오스위고는 미국에서도 아름다운 노을 풍경을 자랑하는 도시 중 하나인데, 온타리오 요새에서 바다와 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 위에 펼쳐진 노을은 많은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호수의 물소리와 그 위를 날아다니는 새, 그리고 하늘을 다양하게 물들이는 노을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 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기 위해 그 프레임 안에 있는 자연 -호수, 구름, 새, 해, 달 등-그 어떤 것도 엄청난 공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새가 날아다니며 “오늘은 노을을 보러 30명밖에 안 왔네, 애들아 내일은 노을 색을 좀 더 진하게 내서 100명은 오게 하자”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에 태어난 목적대로 그냥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그 모습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아등바등 살고 있던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아마 80년 전에 자신의 ‘인종’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고, 삶의 터전을 도망 나와야 했던 유대인들에게도 포트 온타리오의 노을이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약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역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본다. 태어났더니 노예였거나, 흑인이었거나, 유태인이었거나 혹은 우크라이나 시민이었다는 이유로 생명에 위협을 받는 일은 이제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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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 the Staff (본캐): 미국 교육 및 미국 여행
https://www.womenshistory.org/education-resources/biographies/harriet-tubman
https://en.wikipedia.org/wiki/Harriet_Tubman